어느 기업의 2012년 다이어리를 펼쳤을 때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된 사훈을 보고 그만 ‘빵’ 터졌다. 인화, 단결, 친절, 믿음 같은 상투적 구호가 아니라 어린 시절 수없이 들어야 했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사훈으로 유쾌한 변신을 한 것이다.
‘신발을 정리하자!’
이 독창적 사훈 아래 작은 글씨로 ‘겸손한 ○○인이 되자’라고 쓰여 있었다. 삶을 대하는 기본 태도로 겸손을 강조한 이 회사의 경영방침을 새해 다짐이자 착실한 생활습관으로 빌려와 잘 메모해 두었다.
새해 목표는 지키는 게 관건
어느 미술관 학예실에서 마주친 쪽지의 글도 새기고 싶은 말이었다. 때 이르게 머리가 세어버린 직원의 책상 앞에 붙어있던 글, ‘보통으로 평범하게 정도껏 살래요’. 얼핏 봐선 소심한 목표인 듯싶어도 보통의 삶이라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종이 연하장 대신에 지인들이 문자메시지로 보낸 새해 덕담도 다양하다. 특별 주문 상품으로 취소, 교환, 환불이 불가한 ‘나이 한 살’ 배송 중. 상품 수령 후 수취확인 부탁’ ‘서로에게 무심했다면 서로 용서하시고 새해에는 좀 더 시간을 내서 희로애락 공유하길’ ‘웃을 일만 가득하고, 좋은 일로만 술 마시고,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거창한 다짐보다 소박한 약속, 강한 구호보다 푸근한 말들이 마음을 끈다. 자기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재능과 기회를 충분히 부여받은 사람조차 자극적이고 폭력적 언사, 비속한 말과 글로 어떻게 하면 세상을 더 놀라게, 혹은 더 놀려먹을지 경쟁하는 세상에 부대꼈나 보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가 ‘한국의 특이한 현상’ 하나를 최근 보도했다. ‘한국인 새해 소망 1위’로 외국어 배우기, 체중 감량, 금연을 제치고 ‘돈 많이 벌기’가 뽑혔고, 대부분은 한 달도 못 돼 새해 다짐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돈에 대한 코리안의 남다른 집착이 세계무대에 우뚝 선 것이야 그렇다 치고, ‘작심 한 달’은 한국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미국에선 새해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를 놓고 돈을 거는 웹사이트가 생겼다. 약속을 못 지키면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 자기가 싫어하는 공화당 관련 기관에 돈을 기부하도록 만든 ‘역발상’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편 가르기에 기를 쓰고, 살 빼기에 애를 쓰는 한국사회에 이를 벤치마킹한다면 온 국민이 순식간에 ‘몸짱’으로 변신할 법하다.
새해 목표든 다짐이든 마음 먹기가 아니라 지키는 게 관건이다. 내게 벅찬 과제를 많이 약속하면 많이 못 지킨다. 그래서 ‘신발 정리’와 더불어 나의 두 번째 새해 다짐 역시 단순한 것으로 골랐다. 내릴 정거장을 지나쳤다고 지하철 역주행을 시키는 경지까지 온 한국형 민주시민사회가 한번 귀 기울여볼 만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벅찬 과제 대신 단순한 것 골라
‘이번 역은 6호선 열차로 갈아탈 수 있는/삼각지역입니다/삼각지역입니다/내리실 문은 오른쪽,/으로 열리는 출입문을 향해/우르르 몰려온다/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듯/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온다/이런, 이런,/그들을 살짝 피해/나는 건들건들 걷는다/건들건들 걷는데,/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열차 들어오는 소리!/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이런, 이런,/이런, 이런,/건들거리던 내 마음/이렇듯 초조하다니/놓쳐버리자, 저 열차!’(황인숙의 ‘갱년기’)
새해엔 바람이 부드럽게 살랑거리듯 건들건들 걸어보는 거다.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려 손을 놓아버린다는 구도자의 마음까진 못 가더라도 전동차 들어오는 소리에 ‘달리기 모드’로 돌입하는 전자동 로봇 같은 내 마음에 대고 “놓쳐버리자”고 주문을 걸 순 있을 것 같다. 브라보 마이 슬로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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