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2009년 ‘5·16과 10·26’이라는 책을 펴냈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 18년의 권력암투를 세밀하게 그려낸 역사서에 가깝다고 자부한다. 기자 출신인 그는 대필(代筆)작가도 쓰지 않았다. 당시 77세이던 이 전 의장이 직접 자료를 찾고 집필하고 교정을 봤다. “역사의 기록인데 날짜 하나라도 틀리면 큰일이잖아. 코피를 흘려가며 일일이 확인했지.” 주변에선 힘들게 책을 냈으니 출판기념회를 열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는 “읽고 싶은 사람만 사 보면 되지, 공연히 사람들한테 초청장 보내 시간적, 경제적 부담을 주기 싫었다”고 말했다.
▷대학 선배의 출판기념회를 찾은 A 씨는 5만 원이 든 봉투를 내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책을 꺼내 보니 정가가 3만 원이었다. 화들짝 놀란 A 씨는 접수창구로 달려가 봉투를 돌려받고 5만 원을 더 넣어 건넸다. 많이 팔릴 책이 아닐수록 정가를 높이 책정하는 경향이 있다. 출판기념회를 열면 적어도 500∼1000권을 정가보다 서너 배 높은 값에 팔 수 있다. 만성 불황에 시달리는 출판계에서 일부 출판사가 출판기념회만 성황리에 열어도 본전을 뽑는 출판기념회용 책에 열성인 것도 이해는 간다.
▷최근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 터지듯 열렸다. 지난 6개월간 1000건이 넘는다. 선거법상 4월 총선 출마자들이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는 마지막 날(90일 전)인 11일에는 30여 곳에서 열렸다. 국회의원 보좌진들은 국정감사와 예산안 심사 준비 같은 본업은 제쳐두고 출판 자료 수집, 출판사와 작가 섭외, 출판기념회 준비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요즘 정치인 출판기념회는 따분한 축사(祝辭)만 이어지는 게 아니라 북콘서트 형식의 대담, 국악 공연, 피아노 연주 등 다채로운 볼거리를 끼워 넣어 손님을 끈다.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 상당수가 ‘얼굴 알리기’ 차원을 넘어 선거자금 모금 창구로 변질됐다. 의원의 상임위와 관련된 기업이나 공공기관들이 수십만∼수백만 원을 책값으로 내놓는다. 국정감사 직전에 출판기념회가 집중되는 것도 ‘대목’을 놓치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이다. 현행법으론 출판기념회 횟수에 제한이 없고 들어온 책값을 선관위에 신고할 의무도 없다. 변칙 정치자금 조달 창구로 전락한 출판기념회를 규제하려면 ‘오세훈법’을 다시 손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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