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집권한 영국 보수당을 이끌던 스탠리 볼드윈은 ‘새로운 보수주의(New Conservatism)’를 제창했다. 평소 보수당 답지 않은 사회적 조화, 산업적 동반자 관계, 국민의 신뢰와 자신감 회복, 대결보다 합의를 중시하는 가치를 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평화를 바라는 국민 정서에 맞춰 보수당이 좀 더 적극적인 사회 경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당내 젊은 세대의 갈망에 부응했다.
볼드윈의 보수당은 이 깃발을 들고 좌우 극단의 거센 파고를 헤쳐 나갔다. 우파 파시즘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1930년대에 유독 영국에서는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지 못했다. 보수당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가 질서와 안정이라면 볼드윈의 보수당은 사회 개혁을 주도하면서 그런 가치를 오롯이 지켜냈다. 영국 보수당이 200년 가까이 그 이름을 걸고 명맥을 잇게 한 원동력이었다.
보수의 반대는 변화가 아니다. 보수는 급진적 변화 방식에 반대할 뿐이다.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지켜야 할 정당한 가치는 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에드먼드 버크가 보수주의 논지(論旨)를 편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영국 내 급진운동에 맞선 시대상황을 염두에 뒀다. 버크는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하여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졌고, 사회발전은 소중한 옛 전통과 새로운 변화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사회의 보수적 가치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토대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회 균등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헌법은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한다. 법 위의 특권이나 법 아래 차별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국민이 헌법적 가치를 ‘먼 나라의 일’로 느끼는 것은 시대 변화에 둔감한 정치 리더십 탓이다.
지난해 여권에선 내곡동 대통령 사저 논란을 시작으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사건 등이 터져 나왔다. 최근엔 돈 봉투로 얼룩진 전당대회 사건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모두가 계속 진행형이다. 한나라당은 “정치는 생물”이라는 자위를 하며 일시적 ‘악재(惡材)’로 생각할지 몰라도 헌법적 가치가 훼손당한 상처는 상당히 오래갈 것이다. 정체성의 뿌리가 흔들리면 한나라당이 던질 변화의 카드는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는 ‘꼼수’로 비칠 수 있다.
최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일각에서 당 정강의 보수 용어를 삭제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논란이 됐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보수 유지로 정리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솔직히 한나라당이 그동안 보수적 가치를 놓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의문이다. 보수적 가치를 굳건히 지켰더라면 갑자기 불어닥친 안철수 바람에 종이호랑이처럼 휘청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5월 한 대학 특강에서 “보수는 힘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라며 “보수,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 이겁니다”라고 단언했다. 논리적 비약이 심하지만 노무현식(式) 보수-진보 프레임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올해 총선과 대선은 ‘박근혜당’과 ‘노무현당’의 전면전으로 치러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 어느 때보다 보수-진보의 가치 투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한나라당을 지켜보면 저 상태로 노무현식 프레임을 벗어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진보하지 않는 진보도 문제지만 보수(補修)하지 않는 보수의 안일함이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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