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작년 7월 27일 경기 용인시 포곡읍에서 동료와 함께 우편물을 배달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집배원이 순직하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다. 자신의 몸이 배수관에 빨려 들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기보다 손에 들고 있던 우편물을 동료 집배원에게 먼저 전달했다. 정부는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기려 그에게 옥조근정훈장을 수여했고 추모비도 세웠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순직공무원 묘역에 안장했다.
요즘 문자메시지로 바로 소통하면서 ‘기다림’ ‘설렘’ ‘반가움’이란 말들이 사실상 실종됐다. 그러나 어릴 적 집배원보다 반가운 손님은 없었다. 밤이 깊도록 연필에 힘을 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수많은 편지지를 휴지통에 던지며 온 정성을 다해 썼던 마음의 편지! 사랑의 정표인 우표를 꼭꼭 눌러 붙이고 행복의 우체통에 넣고 오면 기다림의 시간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갔다. 마루에 앉아 집배원의 “편지 왔어요”라는 소리에 ‘만세’를 외쳤던 학창시절은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이다.
집배원은 도시로 공부하러 간 형 또는 일하러 가신 부모님의 소식을 전해주는 정(情)의 메신저였고, 글자를 모르시는 할머니를 위해 아들의 편지를 대신해 읽어줄 때면 감사의 메신저였다. 또 군대 간 애인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가씨에게는 사랑의 메신저였고, 학창시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여학생과 펜팔로 이어주는 희망의 메신저였다. 단순히 우편물을 배달하는 배달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튼튼한 다리였다.
편지를 반기는 분들의 따뜻한 눈빛과 고마워하던 사람들의 마주잡은 손길을 자긍심으로 삼으며 우편물이 가득한 20kg의 무거운 행낭을 메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길이 험하고 높아도 인고의 비탈길을 행복한 마음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것이다. 때론 인적이 드문 시골이기에 더 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했지만 누군가가 정성을 담아 쓴 사랑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보람으로 묵묵히 정과 정을 이어주는 전령사가 되었을 것이다.
TV에서 집배원의 일상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인적이 드문 시골집들을 방문하면 할머니들은 아들이 찾아온 듯 반갑게 맞이하며 늦가을 감나무에서 막 딴 선홍빛 홍시를 내놓았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풍경이었다. 산 오르막길 중간에 손바닥만 한 빨간색 우편함이 있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집배원이 올라오기 힘들다고 집주인이 오르막길 중간에 설치한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인정이 들꽃처럼 향기로웠다.
애달픈 사연도 있었다. 정년을 앞둔 한 집배원은 25년 동안 험한 설악산을 10시간 동안 오르내리면서 다리를 너무 많이 써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편지 배달원이 아니라 인정 배달원이라는 그의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아들에게 20년 넘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집배원들이 전해준 편지가 500통이 넘는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해주는 천사 같은 집배원!
가끔 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겨울 묘비 앞에 낙엽처럼 놓여 있다. 미처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들이 담겨 있지만 가끔 겨울비에 젖고 눈보라에 휩쓸리는 풍경을 보면 눈물이 난다. 이런 풍경이 못내 안타까워 올해 충청지방우정청과 협조해 대형 ‘하늘나라 우체통’을 설치한다. 유가족들이 하늘나라에 있는 아들, 아버지, 남편에게 편지를 써 하늘나라 우체통에 넣으면 직원들이 가족 대신 묘비 앞에서 읽어준다.
집배원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겨울 빙판 위를 달리다 사고로 다치기도 한다. 오늘도 함박눈을 맞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긍심을 갖고 험한 산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을 집배원들의 노고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추운 겨울, 편지 한 장을 손에 들고 오는 집배원을 만난다면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차 한잔 대접하면서 “고생하신다”는 정이 담긴 말 한마디 건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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