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박소명]한겨울밤의 이야기

박소명 동화작가·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고향 집에는 눈이 참 자주 내렸다. 저녁 무렵 눈이 날리면 아버지는 닭장을 더 단단히 살폈다. 이런 날에 닭을 노리는 노련한 살쾡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닭들은 횃대에 나란히 앉아서 눈 쌓이는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잘 마른 장작으로 군불을 땠다. 굵은 고구마 몇 개도 던져 넣었다. 어둠이 성큼 와서 앉아도 눈 쌓인 마당은 아주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바람이 멈춘 뒤란 대숲은 고요했다. 가끔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곤 했다.

이때쯤이면 어김없이 하얀 마당에 발자국을 찍으며 마실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기침을 하면서 들어서는 먼 친척 할아버지, 팔순이 넘은 앞집 할머니, 몇몇 이웃 어른, 아이들 두엇도 따라왔다. 군불로 덥혀진 방 안에는 밤새 이야기가 익어갔다.

담뱃대 행상을 다녔던 친척 할아버지는 만주, 러시아까지 떠돌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목소리도 컸지만 듣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것 같았다.

한밤중에 산을 넘을 때면 우산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갔다고 했다. 그러면 산짐승들이 어이쿠 나보다 입이 더 큰 놈이군, 하면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한번은 굶주린 늑대가 모닥불 가까이 다가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불타는 나뭇가지를 마구 던졌는데 늑대 털에 불이 붙어 간신히 물리쳤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숲과 황량한 벌판을 상상하곤 했다. 앞집 할머니도 잔기침을 하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밤새 귀신에게 홀려 산을 헤맸다고 했다. 저수지 앞까지 끌려가 물에 빠질 찰나에 닭이 울었고 귀신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지만 늘 무섭고 흥미진진했다.

할머니는 또 강변 쪽에서 마을 뒤 공동묘지까지 도깨비 불덩이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어찌나 빨리 날아가는지 보통 사람은 볼 수 없고 신통력을 가진 할머니만 봤다니 정말 신기했다. 순간 문 밖으로 불덩이가 지나가는 것 같아 나는 이불 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이야기가 후끈 달아오를 때면 엄마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눈이 참 많이도 오시네!”

엄마는 속이 노랗게 익은 군고구마를 가져왔다. 광에서 홍시도 꺼내 왔다. 살얼음 낀 동치미도 떠왔다.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나도 엄마 무릎을 베고 솔솔 잠 속으로 빠졌다. 호랑이, 여우, 늑대, 살쾡이를 보았고, 괴상하게 생긴 동물들에게 쫓겼다. 눈 덮인 숲과 벌판, 물결치는 저수지를 헤맸다. 푸른 별나라와 온갖 상상의 나라를 오가는 꿈을 꾸곤 했다.

돌아보면 사랑방에 모였던 이야기꾼들은 모두 동화작가였다. 그 겨울밤에 들었던 이야기와 꾸었던 꿈은 내가 쓰고 있는 동화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뜻한 방 안에서 그리운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 함박눈이 흐벅지게 내리고, 살쾡이 한 마리가 닭장 옆을 기웃거리는 밤이라면 더 좋겠다.

박소명 동화작가·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