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극인]日지도층의 삐뚤어진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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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30일 03시 00분


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지난달 일본에서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서정과 애국’. 86세의 선생은 수화기 너머로 “마지막 책”이라고 했다. 평생 한일 양국의 ‘창(窓)’으로 헌신해온 그였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책장을 펴자 선생의 가슴으로 본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詩歌)가 소개돼 있었다.

‘눈 속에 지는 해보다 어슴푸레하게 참회하는 마음 슬프지만/한밤중에 깨어날 때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 나 눈물 흘릴 때 있어.’ 일본 근대 단가(短歌)의 1인자 사이토 모키치(]藤茂吉·1882∼1953)의 초기 작품 중 한 구절이다. 한밤의 고요함에 눈물겨워할 정도의 감수성을 가졌던 그였지만 얼마 후 태연하게 전쟁시가를 읊는다. ‘수많은 군마 상륙하는 모습 보고 나 뜨거운 눈물 거둘 수 없어/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 된 지금 천둥치는 불꽃으로 쳐부숴야.’ 믿기 어려운 자기분열이라는 게 지 선생의 비판이다.

일본은 패전했고 사이토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 나라의 하늘을 날 때 슬퍼하라, 남으로 향하는 비 오는 밤 기러기야/누구나 모두 탄식하는 시대에 살아남아 내 눈썹도 희어졌네.’ 지 선생의 마음은 무거웠다. 과거 전쟁 찬미에 대한 역사적 윤리적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일본이 이번에는 패배했고, 그래서 슬프고 처량하다는 것이다.

전후 깊은 자기반성에 빠지게 됐다는 ‘구도자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1883∼1956)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 선생은 “그의 자기비판적 사고는 자신과 일본을 중심으로 맴돌았을 뿐, 그러한 일본이 아시아에 끼친 헤아릴 수 없는 피해, 그 괴로움과 슬픔에 대해서는 그의 상상력으로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인식 부재는 지 선생의 눈에만 비친 게 아니었다.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외무성 포위 시위를 주도했던 시민운동가 노하라 신사쿠(野平晉作) 씨는 “오른손잡이 사회에서 왼손잡이의 고통은 인식영역 밖에 있다”고 말했다. 맞시위를 벌인 우익 진영에 적지 않은 여성이 참여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기자에게 들려준 답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일본 국민도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정부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가장 피해가 컸던 오키나와 주민조차 정부에 항의하지 못했다. 일본군에 내몰려 사망한 가족도 군속이나 군 협력자로 등록해야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靖國)신사도 같은 방식으로 일본 국민을 오른손잡이로 만들어갔다. 아버지와 오빠가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영웅시되는데, 남은 가족이 침략의 역사를 비판할 수 있겠나. 정부에 항의를 못하니 피해자에게 사죄도 못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지도층의 삐뚤어진 자국 중심주의는 어쩌면 불치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일본 사회 곳곳에서 정부와 자치단체 주도의 우경화, 국수주의 경향까지 포착되고 있다. 새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독도 도발과 교과서 왜곡도 빼놓을 수 없다.

지 선생은 탄식했다. “드디어 일본이 다시 아시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 자기의 아픔은 알아도 남에게 준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일본인의 발상에 있어서 중대한 결함이자 아시아 전체의 고뇌다.”

그래도 노하라 씨 같은 일본인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지 선생은 책 출간 후 이어진 일본 독자들의 반성 전화를 소개하며 새로운 동아시아의 가능성을 기대했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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