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지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다. 10리가량 떨어진 산골 마을을 피란처로 정했다. 마을로 가는 도중 맞은편에서 지게를 진 아저씨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그는 우리 삼형제를 보더니 몸을 낮추고 한 개씩만 집어가라고 하셨다. 발채에는 잘 익은 복숭아가 가뜩 담겨 있었고 우리는 하라는 대로 했다.
60년도 더 지난 옛일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림이 눈에 생생하다. 저 6·25전쟁 쑥대밭에서 겪은 뜻밖의 선의요, 보답이 있을 리 없는 무상의 호의이기 때문이리라.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것은 그때 고맙다는 소리를 못했다는 것이다. 열여섯 살에 맏이인 내가 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런 훈련을 받은 바 없었고 숫기도 순발력도 없었던 탓이다. 인사 못한 것을 후회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 일을 떠올리는 걸 되풀이하는 사이에 첨가된 후속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기억 자체가 해석행위의 반복이란 것은 옳은 말이다.
여태껏 살아오는 고비 고비에서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세상은 각박한 곳이지만 한편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고마운 이들 덕분이다. 그 고마움은 난리 통의 복숭아가 보여주듯 반드시 크고 값비싼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열 가구 되는 작은 마을에도 충성하고 믿음직스러운 이가 있다’는 ‘논어’의 대목을 좋아한다. 경험적 사실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일곱 살에 들어가 일흔에 빠져 나오기까지 몇 해를 빼고는 평생을 학교에서 보냈다. 고마운 분들이나 경멸에 값하는 인간 저질을 모두 학교나 그 주변에서 만난 셈이다. 4·19혁명을 전후한 몇 해를 충주사범학교에서 근무했다. 첫 직장이었다.
그때 만난 교장 중의 한 분이 윤봉수(尹鳳洙) 선생이다. 소박한 풍채와 옷차림에 조용한 인품인 선생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조회에서 학생에게 훈화를 할 때 반말을 쓰지 않고 경어를 썼다. 교직원에게나 학생에게나 선생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선생은 또 이따금 학교 운동장에 가서 혼자 풀 뽑기를 하곤 했다. 처음엔 놀란 서무과 직원이 달려 나가 사람을 써서 깔끔하게 정리할 터이니 들어가시라고 했다. 선생은 무료해서 그런다며 풀 뽑기를 계속했다. 그 후엔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불편해진 교사들 사이에서 괜한 위선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다. ‘인상 관리’의 일환이라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겪어보는 사이 선생의 소박한 언동에 토를 다는 일은 없어졌다. 학생들은 선생에게 ‘간디’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인품을 잘 드러내는 작명의 걸작이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학생들의 별명 작명은 해당 인물을 잘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선생의 인품에 감복한 것은 전임 교장과 좋은 대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대학을 나온 ‘시골 수재’란 공통점이 있었지만 전임 교장은 권위주의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다.
5·16군사정변 직후 전국 규모의 통폐합으로 청주·충주사범이 청주교대로 발족했다. 두 학교의 교원을 놓고 교대 교원 전형을 했다. 후보자 선정은 청주사범 교장이 담당했다. 다행히 후보로 추천돼 황급히 논문을 쓰고 문교부에서 이양하 선생의 면접 심사를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이라며 간디 선생이 강력히 추천한 덕분이었다. 전임 교장 시절 근무평가에서 꼴찌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 고맙게 생각했다. 선생이 내색을 하지 않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도 못했다.
훗날 알게 됐지만 선생은 광복 직후 좌파 평론가로 사납게 활약한 김동석과 대학 동기였다. 재주꾼이고 영어와 한문을 잘해서 외인 강사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으나 법과에서 영문과로 전과해 갔다고 들려주었다. 잃어버린 시절의 사표가 돼 주었던 겸허하고 깐깐했던 간디 선생은 애석하게도 정년 전에 작고하여 향리인 경북 상주에 묻히셨다.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친구가 읽는 조사를 통해 선생의 아호가 ‘자하(紫霞)’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문의 멋을 아는 마지막 세대의 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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