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지사가 작년 말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회원들에게 인사말을 통해 “DJ와 JP가 연합해 겨우 39만 표 이겼고 정몽준 씨랑 그 새벽에 난리를 부려서 겨우 57만 표 이겼다”며 “진보의 정체성을 깊게 하고 넓혀 여기에 더 얹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안 지사는 민주당이 신승(辛勝)했던 1997년, 2002년 선거 이야기만 하고, 크게 패했던 2007년 선거는 언급하지 않았다.
요즘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의 실점(失點) 때문에 야권의 대선 후보군이 상대적으로 약진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530만 표 차로 대승을 안겨줬던 국민이 4년 만에 어쩌면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싶다. 민주통합당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안철수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말이 나온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민주통합당을 보면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넘어 자만이 발동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야권연대에 관심이 식은 민주당을 비판한 말이다. 요즘에는 “집권 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운운하는 민주당을 보며 다른 측면에서 민주당의 오만과 전략 미스를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명숙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이 미국대사관에 몰려가 한미 FTA를 집권 후 폐기하겠다고 소리치는 모습은 10년 국정경험이 있는 정당이 아니라 철부지 한총련 대학생들 같다. 전략적으로 현명하지도 않은 것 같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민주당 또는 진보당 성향이다. 5선의 박상천 의원은 불출마 기자회견에서 “중도 성향의 유권자가 선거를 좌우한다”며 “민주당의 진보는 중도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진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한미 FTA 반대를 야권연대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뜻이 있겠지만 중도와 안정추구 세력의 불안감을 증폭시킬수록 중원(中原)의 정치적 지향이 새누리당 쪽으로 이동해갈 것이다.
한총련 수준의 ‘FTA 폐기’ 데모
민주당 사람들은 종합편성TV 출연도 거부한다. 이해찬 전 총리는 신문 인터뷰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트위터 같은 미니(mini) 커뮤니케이션이 숫자도 많고 속도도 빠르다”고 말했다. 매스컴을 경시한 오만한 분석이다. 정치에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 중요하다. 트위터 팔로어들과의 소통은 같은 편끼리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성격이 강하고 외연(外延) 확산의 효과는 크지 않다.
과거 DJ는 부수가 많지 않거나 비판적인 월간지 주간지의 인터뷰 요청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경향신문의 주간지 뉴스메이커 조은희 기자(전 서울시 정무부시장)는 1995년 초 괌으로 휴가 간 DJ를 만나러 갔다.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런던에 가 있다 귀국한 DJ가 정치 복귀를 저울질하며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조 기자는 괌 호텔을 수소문해 DJ를 찾아내 다짜고짜 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DJ 부부는 휴가를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DJ는 “노력하는 기자에게는 기회를 줘야 한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DJ는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한 월간지가 인터뷰 요청을 하자 원고를 사전에 읽어보는 조건을 달아 인터뷰를 수락한 적도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지난달 부산 유권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 쪽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감이 문제이며, 이것이 진보진영의 품을 넓히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한 말을 쏟아내며 한미 FTA 반대에 앞장서는 천정배 정동영 유시민의 지지율이 답보상태이고 안철수 문재인의 지지율이 부상하는 것을 보더라도 극단적인 진영논리는 후보 개인은 물론이고 민주당 전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미 FTA에 관해 “을사늑약” “이완용” 운운한 정 의원에 대해선 “2007년 선거 때는 그렇게 극좌파인 줄 몰랐다. 하마터면 손가락을 자를 뻔했다”고 말하는 유권자들도 있다. 민주당이 한미 FTA 반대를 통해 농촌에서 의석을 몇 개 더 건질지는 모르겠으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 간 협정이 오락가락하는 나라와 앞으로 어느 나라가 협정을 맺으려고 할지 깊이 생각해봤는가.
유권자 접촉 놓치는 ‘종편 외면’
살기가 팍팍한 다수 서민과 일자리를 못 잡은 20, 30대들의 반(反)새누리 반MB 바람은 총선 대선을 앞둔 민주당으로선 호재다. 그러나 민주당은 39만 표, 57만 표 이겼다가 530만 표 차로 패했던 쓰라린 기억을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다. 노무현을 찍었다가 이명박으로 돌아섰던 스윙 보터(swing voter·특정 정당 충성도가 낮은 유권자)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선거에서 MB 정권과 새누리당을 혼내주고 싶지만 과연 민주당 사람들에게 정권을 다시 넘겨도 나라가 온전할까”라고 걱정하는 이야기를 요즘 자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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