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자 신문 사회면 한구석에 낯익은 이름이 실렸다. 전 국가정보원 6급 직원 김기삼 씨(49)가 미국 망명을 허락받았다는 뉴스였다. 김 씨는 2005년 김영삼(YS), 김대중(DJ) 정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가 주요 인사들을 상시 불법감청(도청)했다고, 2003년에는 DJ 정부가 노벨평화상 수상을 목적으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북한에 거액을 줬다고 폭로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미해 2003년 12월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고 8년만에 최종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에 살고 있는 김 씨와 인터넷 화상전화 인터뷰를 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11일 오전 10시, 그곳 시간으로는 10일 오후 8시였다.
―심경이 어떤가.
“힘들었다. 힘없는 개인이 조직과 정권에 대항해 싸우다니 ‘미친 짓’을 했구나, 신세 한탄도 많이 했다. 2년 전 부친 임종도 못했다. 천추의 한이 됐다.”
그의 목소리는 자주 갈라졌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인가.
“아니,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그게 나였을 뿐이다.”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나.
“미국 변호사 자격증이 있지만 망명 신청자 신분이어서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 대학에 입학해 공부도 하고 한국의 변리사 자격증인 미국 특허변호사 자격증도 땄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는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후배들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잘살아야 한다는 오기가 있다.”
―미국이 정치적 망명을 승인한 이유는 뭔가.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북한 요원들의 암살 위험으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거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12월 미 법무부 이민심사행정실(EOIR) 산하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지방 이민법원 판결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김정일 비방을 포함한 김 씨의 폭로 이후 파문을 감안할 때 북한 암살조의 ‘최우선 표적(prime target)’이 될 것… 김 씨에게 신변 보호를 제공해야 할 한국 정부는 체포령을 내리고 통신을 감청하고 여행을 제한해 신변을 보호할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또 여러 증언과 증거들을 볼 때 한국 정부는 그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
―2008년 4월에도 이민 허락 판결을 받았다가 이민국 검찰이 항소하는 바람에 연기됐는데….
“이번에는 미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최종 확정됐다. 판결 1년 후에 영주권 신청 자격이 생기고, 5년이 지나면 시민권 신청 자격이 생긴다.”
―서울대 법대 84학번이다. 이른바 ‘386세대’다. 하지만 운동권도 아니었고 2010년 자서전 형식으로 펴낸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에 쓴 대로 ‘주변부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쩌다 투사가 됐나.
“나는 투사가 아니다.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대학 때 운동권 서클을 기웃거리긴 했지만 당시에 풍미했던 ‘주사파(주체사상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한은 비판하면서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니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니 하며 북한에 침묵하고 동경하는 그들을 경멸했다. 안기부에 들어와 언젠가 누가 내게 ‘장점이 뭐냐’고 묻길래 ‘공무원으로서 남들보다 윤리의식이 좀 더 강한 것 같다’고 답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게 단점이었던 것 같다.”
―안기부에는 왜 들어갔나.
“내가 좀 특이한 데가 있다(웃음). 남들이 말한 것에 대해 ‘진짜 그런가’ 체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랄까, 모험심이랄까. 다들 ‘양키 고 홈’을 외치던 시절에 카투사에 입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온갖 반미(反美) 사고에 절어 있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미국이 나쁜 나라가 아니었다. 제대 후 고시는 싫고, 뭘 할까 고민하는데 윤석양 보안사 이병이 ‘보안사 파일 폭로’ 사건(1990년)을 터뜨렸다. 그때 정보기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행동하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이론적으로 NL(민족해방)보다는 PD(민중민주) 노선에 관심이 가서 ‘사로맹’에 심정적 동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로맹이 안기부에 한날한시에 일망타진되는 것을 보면서 안기부가 어떤 곳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굳혔다.”
―실제로 어땠나.
“민주 인사들을 고문하고 권력의 주구로 알려져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많았고 애국자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한심한 공무원’이라고나 할까. 특히 좌파 정권 시절엔 국가 안보를 해치는 일에 앞장섰다. 그래놓고 사과 한마디가 없다. 국정원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본다.” 그는 이어 “국정원에 있으면서 한국의 좌익과 야당의 이중성을 본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고도 덧붙였다.
―2000년 안기부를 퇴사하고 2003년 1월 30일 인터넷 언론에 DJ 정부의 15억 달러(약 1조7000억 원) 불법 대북송금, 노벨상 수상 로비 의혹을 제기한 후 2005년엔 도청까지 주장했는데….
“퇴사하고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DJ 정권이 대북송금 문제를 2억 달러만 인정하고 덮으려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북송금액이 15억 달러에 달한다는 주장은 실제로 겪은 게 아니라 남의 말(미국교포 사업가 윤홍준 씨)을 옮긴 것이다.
“윤 씨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남북을 오간 사람이다. 김정일도 만났다. 북한 정보를 안기부에도 많이 알려줘 윤 씨 담당관까지 안기부에 있었다. 1997년 12월 대선 직전 DJ의 대북 커넥션을 폭로하는 기자회견, 소위 북풍공작으로 1년 6개월 징역을 살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건강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 2002년 10월 윤 씨가 워싱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만났다. 그리고 ‘15억 달러가 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제공되었으며 이는 북한 고위층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제보를 들었다. 그가 퇴사한 나한테 거짓정보를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의 많은 자원과 예산이 DJ의 노벨상 수상 노력에 쓰였다. 이는 로비를 넘어 명백한 공작”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주도한 인물로 DJ 공보비서 출신 김한정 씨를 지목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자료는 국정원 내부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거다. 김한정 씨와는 1999년 2월부터 4개월간 국정원장 산하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함께 일했다. 그곳은 당시 이종찬 원장이 노벨상 ‘공작’을 위해 특별히 만든 임시 기구였다. 김 씨는 이후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옮겨 아태 민주지도자 포럼(FDL-AP), 국정원, 주노르웨이 대사관 등을 총동원하여 노벨상 공작을 지휘했다. 그도 일개 도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남북 정상회담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배후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는 살펴야 하지 않는가. 평화통일을 위한 것인지, 분단 고착을 위한 것인지, 거래는 없었는지 말이다. 나는 정상회담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게 아니다. ‘DJ가 노벨상에 눈이 멀어 정상회담이라는 이벤트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김정일에게 천문학적인 뇌물을 건넸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대기근으로 다 쓰러져가던 김정일 정권 연장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핵무장에 쓰였다’는 게 내 주장의 요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가장 존경했던 분이 황장엽 선생이다. 황 선생은 나를 보고 ‘북한을 5년만 더 조이면 무너지겠다는 판단하에 내려왔는데 남한이 큰돈을 쏟아붓는 바람에 물 건너갔다’고 혀를 찼다. DJ,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돈맛을 본 북한은 남한을 이제 ‘호구’로 본다. DJ는 몰래 주었지만 노 정부 때는 남북협력기금을 통해서 내놓고 줬다. 현 정부 들어서는 남한에서 고분고분 돈을 안 주니까 천안함 사건을 일으켰다고 본다.”
그는 “북한은 형제이면서 적이다.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접근은 금물”이라면서 “어떠한 비용이 들더라도 북한 동포들은 품어야 하지만 무슨 희생이 따르더라도 북한 정권에는 대적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안보는 우리가 지킨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보가 크게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진실 규명을 위해 귀국할 용의가 있나.
“물론이다. 한국 정부가 제대로 된 조사를 한다면 언제든지 응할 뜻이 있음을 수차례 밝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의지를 표명한 적이 없다. 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계획은….
“먹고살아야 한다. 10년 동안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든 증언을 했는데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는 ‘폭로’ 대신 증언이란 표현을 써달라고 했다. 지금까지 그의 ‘증언’이 그랬듯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면 많은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시공간이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그와 컴퓨터 화면을 보며 나눈 대화가 3시간가량 지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혼잣말처럼 “이제 헤어나고 싶다”고도 했다. 내부 고발자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어찌됐든, ‘북한’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그의 삶이 좀 편하지 않았을까…. 모니터 화면 속에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분단된 땅에 태어난 동시대인으로서의 연민이 느껴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김기삼은 누구인가 ::
1993년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 입사한 뒤 정보학교(정규30기)를 나와 대공정책실장 부속실, 해외공작국 정보협력과, 정보대학원, 국제정책실, 대외협력보좌관실, 대북전략국에서 근무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디킨스 법과대학원을 수료했다. 2002년 3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2003년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기소중지 상태다. 국내에 들어올 경우 피의자로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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