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알기 쉬운 명제를 제시해 보자. ‘전체주의국가는 반드시 독재자를 필요로 한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과 같은 예를 들지 않아도 절대적 지도자 없이는 전체주의국가는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체주의국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옹립되는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스스로 이론화한 전체주의적 국가유기체설인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따르면 최고지도자는 뇌, 노동당은 중추신경, 인민은 세포에 비유된다. 이 때문에 후계자 부재 상태에서 최고지도자가 쓰러지면 북한은 국가적 ‘뇌사’ 위기에 처하게 된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몸 왼쪽이 부자유스러운 채 정무에 복귀한 김 위원장은 바로 후계체제 만들기에 착수해 이듬해 1월 초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 조선중앙TV는 ‘축배를 들자’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방송했고, 이날 노동신문은 4면에 악보와 가사를 실었다. 김정은의 탄생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는 곧 후계자가 결정됐음을 알리는 통보였다.
그해 2월부터 4월에 걸쳐 김정은 측근체제 만들기가 급속히 전개됐다. 현재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영호 당시 평양방위사령관과 김영춘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각각 인민군 총참모장과 인민무력상에 올랐고,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국방위원에 임명됐다. 총참모장 자리를 이영호에게 내준 김격식 대장은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인사로 김정은은 독재자가 된 것일까. 집단적인 보좌를 받는 한 그 지도자는 더 이상 독재자라고 볼 수 없다. 장래에 김정은 사령관이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해 군림하기까지 북한에는 독재자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후견인들의 연령으로 판단컨대 그때까지는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 독재자가 없는 북한의 정치체제는 어떻게 될까. 김정은을 정점으로 추대하는 집단적인 보좌체제는 북한 정치를 왕조시대의 정치로 회귀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북한 지도부 내에서 김정은에 의한 권력승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국왕 밑에서 왕정관료들은 세력다툼만 할 뿐이다. 혼인 관계에 있는 외척이 정치를 전횡하면 그것은 ‘세도정치’와 다름이 없다.
북한의 정치체제가 변화했어도 정책적으로 큰 변화가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먼저 김 위원장의 유훈의 존재가 정책 변화를 억제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의식해온 김 위원장은 아들을 위해 많은 유훈을 남겼다. 핵무기나 미사일 개발, 남북·북-미관계를 포함한 대외정책,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 등 유훈은 여러 갈래에 걸쳐 있다. 김정은을 둘러싼 당과 군 관료들이 서로 견제하면 할수록 그로부터 일탈하는 위험을 무릅쓰기가 불가능한 구조다.
두 번째로 김 위원장 사망으로 중단된 후계작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올해 4월 김 주석 탄생 100주년과 인민군창건 80주년 혹은 10월 노동당창건 기념일을 전후해 김정은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나 노동당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취임해 12월 한국 대통령선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당과 군의 관료들은 새로운 ‘뇌’의 형성이라는 공통 목표를 최우선으로 할 것임에 틀림없다.
북한과의 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다면 아마도 내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위 레벨의 남북대화 부활에서 시작해 북-미, 6자회담으로 진척시켜 나가는 것이 김 위원장의 대외전략이었다고 한다면 북한의 대외정책 역시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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