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윤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정통 경제관료의 맥을 잇는 공무원으로 꼽힌다. 1981년 공직에 입문한 뒤 특히 국내외 금융 정책을 많이 다뤘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뀐 최근 20년 동안 관료 사회도 업무외적 부침(浮沈)이 많았지만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순탄한 경력을 쌓았다. 다음 정부에서 유력한 장관 후보로 손색이 없다.
“30년 공직생활에 이런 선거는 처음”
신 차관은 그제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권의 포퓰리즘 행태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여야가 야합해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한 저축은행특별법과 재원 고민도 없이 남발되는 복지 공약 등을 거론하며 “공무원 생활을 30여 년 하면서 여러 선거를 봤지만 요즘이 가장 심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지속 가능성 없는 과잉 복지는 결국 후손에게 큰 부담을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재벌 문제를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대기업을 너무 몰아세우면 국내에 투자하지 않고 외국에만 투자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내가 그의 발언에 주목하고 전화를 건 것은 차관이라는 자리의 특성 때문이었다. 장관이라면 금배지에 관심이 없는 한 더 욕심을 낼 공직이 드물지만 장관 자리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차관은 처지가 다르다. 내년에 정권을 잡을 여야 주요 정치세력에 ‘찍히기 십상인’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경제부처를 취재하는 후배들에게 들어보면 정치권 행태에 입을 다무는 공무원이 부쩍 늘었다.
신 차관은 “과거에도 선거가 있는 해는 공약 남발이 있었지만 여야 모두 최소한의 재원 문제는 고민했는데 올해는 딴판”이라고 우려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번 발언 때문에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장관되는 게 어려워지지 않겠느냐”고 묻자 “차관까지 한 사람이 문제가 뻔히 보이는데 다음을 신경 쓰느라 소신을 굽히고 싶진 않다”고 했다. 현장기자 시절 알았던 경제관료 중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사람을 꽤 봐왔던 터라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2002년과 2007년 대선 때 경제정책 담당 차장과 경제부장으로 일한 경험을 통해 나는 한국에서 선거가 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실감했다. 이런 위기감 때문에 올해 총선과 대선이 미칠 수 있는 경제 리스크를 경고하는 글을 지난해 몇 차례 썼다. 하지만 막상 2012년이 시작되고 두 달도 안 된 오늘까지 정치권의 막가파 행태를 지켜보면서 “정말 이러다가는 우리나라가 거덜 나겠다”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요즘 한국 정당들은 과거 어떤 시절보다도 더 왼쪽으로, 그리고 무책임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축이 된 통합진보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김대중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정통 야당의 적자(嫡子)를 자부하는 민주통합당과, 박정희의 산업화 세력과 김영삼의 민주화 세력의 정신을 잇는다는 새누리당도 전신(前身)인 여러 정당과 비교할 때 좌향좌 움직임이 뚜렷하다. 그 와중에 멍들어갈 경제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정치권發 정책 거품 거듭 경고해야
정치권의 각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행정부까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앞날이 더 암담해진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물론이고 모든 공무원이 대선까지 남은 열 달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공복(公僕)의 의무를 각별히 되새길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권발(發) 정책 거품의 허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노력에도 힘을 보탤 시점이다.
공직자들이라면 적어도 우리 경제의 추락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大義)에는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요즘 한국 정치권의 분위기에 일정 부분 제동을 못 걸면 어느 해외 학자의 글에서 읽었던 ‘터널 속의 빛’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터널 저쪽에서 보이는 빛은 광명천지의 빛이 아니라 참사(慘事)를 예고하면서 이쪽으로 질주해오는 기관차의 불빛일지 모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