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한국사회 갈등의 고리를 끊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17일 03시 00분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1998년 2월 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순천이 고향인 내게 그날은 특별했다. 전라도 사람들이 평생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소망해 온 김대중 ‘선생님’이 대통령에 취임한 일은 흥분되고 감개무량했다. 유진벨재단 이사장인 나의 둘째 형 스티브 린튼은 김대중 대통령은 불가능하다고 수차례 말해 왔다. 표 숫자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형 말씀과 하늘의 뜻은 달랐다. 김종필 씨가 합세해 충청도 표를 몰아줬고 보수 진영은 이인제가 표를 분점했다. 하늘에서 준비한 이변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가 “김대중”을 외쳤다. 엄숙한 분위기를 깬 당황스러운 연호였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희호 여사도 함께 웃어 넘겼다. 행사를 마친 뒤 식사 자리에서는 순천이 고향이라는 식당 주인이 기쁜 날이라며 밥값도 받지 않았다.

이날 취임식 행사 가운데 가장 감격스러웠던 일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취임식장에 나란히 앉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한 장면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정적을 넘어 ‘원수’에 가까울 정도로 반목했던 이들은 취임식 직전인 1997년 12월 특별사면됐다.

나는 1994년 당시 정치 야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대북 구호사업을 하면서 북한을 왕래하던 일과 관련해 그의 견해를 듣고 싶었다.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돌아가셨지만 어떻게 전두환 전 대통령을 그냥 놔두고 사십니까. 나 같으면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끓어 넘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래봐야 뭐가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취임식 때 이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한국에서는 신임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가만 놔두지 않는 ‘보복의 정치’가 반복돼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투옥되는 것을 보면서 외국인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어떻게 국가원수를 지낸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가. 이런 일은 어느 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도 감옥살이를 했다.

불행하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사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전라도 문화에 익숙한 나는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심리를 충분히 이해한다. 고향 사람들은 누군가와 크게 다퉜을 때 “나(내)가 확 죽어부러(죽어버려)”라고 내뱉기도 한다. 어찌 보면 죽음은 상대에 대한 가장 큰 보복이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시각은 다르다. 한국에서 사회 지도층이 간혹 자살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일을 놓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무라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냐”고 묻는 외국인 친구도 있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보복의 역사가 ‘과거형’만은 아니어서 이명박 대통령 역시 임기가 끝나면 많은 일을 당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도 있다.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선호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한국 정치의 행태는 사회가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증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 대통령을 예우하지 않고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어떤 결과가 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보복은 반드시 파괴와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한국은 좌우, 진보와 보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어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 손해 보는 쪽은 결국 한국인 자신이다. 언젠가 한국은 통일을 위해 북한과 화해해야 한다. 하지만 먼저 남남의 통일부터 이뤄야 할 것 같다. 규칙 안에서 서로 대하고, 선을 넘지 않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연습은 통일을 위한 예습이기도 하다. 오해하고 싸우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화해와 용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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