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단상/안덕근]개방 그리고 중국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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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8일 03시 00분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민주화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라는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게 저항하다 결국 가택 연금된 채 사망한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은 중국 개혁개방의 대표적 선구자다. 2009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에는 쓰촨 성 제1서기로 근무할 당시 유럽을 방문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의 구릉지역을 들렀는데 건조하고 여름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식량난에 허덕이던 중국이라면 산을 깎아 계단식 밭을 만들고 수리 공사를 해 식량을 생산해야 마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리스 농민들은 식량 대신 기후에 적합한 올리브를 심어 올리브유를 수출하고 식량을 수입해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처럼 무역으로 번성한 농촌은 비단 그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식량 생산 중심의 농촌경제 정책에 몰입돼 있던 중국 지방정부 책임자에게 척박하고 건조한 남부 지중해 연안을 세계적인 와인산지로 바꾸어 놓은 프랑스와 흐린 날씨에 비가 그치지 않는 서해안지역에 풀을 심어 대규모 목축단지로 조성한 영국 등의 사례는 무역과 개방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 돌아와 농민들에게 곡식 대신 면화 생산을 허용하고 정부는 면화 대신 곡식을 수입해 공급하자 불과 1, 2년 사이 국내 면화 생산이 급증해 농촌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 이런 경험은 국제시장에 진입해 무역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낙후되고 아예 현대화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는 계기가 됐다. 이런 중국 지도부의 개방에 대한 신념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취임 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적극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한 얘기가 나온다. 노동현장에서 인권변호사로 헌신하던 노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대북정책 기조를 밀어붙이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하면서 대미외교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인 한미 FTA에 대해서는 그 위험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고 새로운 도전을 권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수많은 정치적 동지가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노 대통령의 굳은 시대적 소명과 신념으로 일궈 놓은 한미 FTA가 정치격론 속에 반미 FTA로 전락할 운명이다. 시대를 이끄는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들의 유지와 말로가 항상 역사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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