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국회의장이 2008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과 관련해 어제 서울 용산구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서 검찰의 방문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현직 국회의장을 공관으로 찾아가 조사하기는 1997년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에 연루됐던 김수한 국회의장에 이어 두 번째다. 국회의장 공관 앞은 이날 새벽부터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당내 선거비리에 연루돼 물러나는 첫 국회의장이라는 것도 부끄러운 일일진대 현직 국회의장 신분으로 검찰 수사까지 받았으니 입법부 수장의 체모가 말이 아니다.
박 의장은 돈봉투 사건이 불거진 이후 계속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버티며 해외순방을 강행했다. 결국 비서였던 고명진 씨가 ‘윗선 개입’을 고백하자 9일 국회 대변인을 통해 사퇴를 전격 선언했다. 13일에는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본인이 직접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그러나 국회의장의 사퇴는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정식 의결 처리해야 하는 사안이다. 선거구 조정을 둘러싼 여야 갈등으로 본회의 개최가 무산되면서 지금껏 처리가 지연됐다. 그로 인해 박 의장이 현직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민주통합당은 박 의장이 해외 순방에서 돌아온 지난달 18일 소속 의원 88명의 서명을 받아 의장직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장이 진위를 떠나 의혹을 받는다는 자체만으로 국회의 수치이자 나라의 망신”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새누리당도 박 의장의 자진 사퇴를 압박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자신들의 뜻대로 박 의장이 사퇴서를 제출했으니 어떻게 해서든 본회의를 열어 국회의장이 현직 신분으로 검찰 수사를 받지 않도록 처리했어야 했다. 여야 스스로 국회의장 공관이 검찰 수사의 칼을 받는 오욕(汚辱)을 불러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의장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다. 물러나겠다고 공개 천명하고 사퇴서까지 냈으면 형식적인 처리 여부를 기다릴 필요가 뭐 있는가. 스스로 짐을 싸 국회의장 공관을 비우고, 제 발로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았어야 했다. 그것이 돈봉투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초래한 의장으로서 국회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국민에게 실망을 안긴 데 대해 사죄하는 길이었다. 국회의장이 공관에 검사와 수사관들을 불러 조사를 받으면 오히려 검찰 수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 형식이 실질을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부실수사 시비를 부르지 않도록 수사의 모양새부터 갖추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