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승훈]‘다문화의 고속도로’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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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2일 03시 00분


전승훈 문화부 차장
전승훈 문화부 차장
알제리계 이민 세대인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 마르세유다. 그의 환상적인 드리블은 ‘마르세유 턴’이라고 불렸다.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마르세유는 이탈리아, 동유럽,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은 항구도시이다.

프랑스 최고의 인기드라마인 ‘인생은 아름다워(Plus Belle la Vie)’의 배경도 마르세유다. 9년째 시청률 20%가 넘는 이 장수 드라마에는 조그만 바를 운영하는 주인공 가족과 알제리 이민자 출신 나시르 가족, 스페인 출신 토레스 가족이 등장해 얽히고설킨 애정관계와 인종차별, 동성애 문제 등을 시시콜콜 보여준다. 빈민가, 범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마르세유는 이 드라마로 프랑스의 ‘다문화 용광로(melting pot)’를 상징하는 활기찬 도시가 됐다.

각국 선거에서 다문화 정책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53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완득이’에 출연한 필리핀 이주여성 이자스민 씨(35)가 새누리당 비례대표 영입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다문화 사회를 꽃피우게 하는 데 TV와 영화는 고속도로처럼 막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방송계의 경우 2005년 파리 외곽 지역에서 벌어진 이민자들의 폭동 소요사태 직후 심각한 자성의 질문이 쏟아졌다. 과연 프랑스의 TV 화면은 실제로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제대로 비추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2009년 프랑스의 시청각고등위원회(CSA)가 16개 채널의 출연자들을 분석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톨레랑스(관용)’ 문화를 자랑하는 프랑스 TV에서 비(非)백인 출연자는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드라마에서는 그 비율이 8%로 줄었고, 뉴스에서 기자, 전문가로 출연하는 유색인종 비율은 6%로 더욱 낮았다. 그나마 TV 속 흑인이나 아랍인들은 마약 밀매자나 범죄인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직시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CSA는 이후 6개월마다 주요 채널프로그램을 분석한 ‘미디어 다양성 감시 보고서’를 내며 방송사들을 압박했다. 이후 각 방송사 내부에 ‘다양성위원회’가 설치됐고, 최대 민영방송인 TF1의 저녁 8시 메인뉴스를 흑인 남성 앵커가 맡는 등 수많은 채널에서 유색인종 스타 진행자가 탄생했다. 반면 국내 TV에 비친 외국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수적으로도 크게 부족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남성들은 임금을 체불당한 불쌍한 이주 노동자, 여성들은 한국 농촌으로 시집 온 며느리와 같은 이미지로만 고착된다. 이자스민 씨는 “첫 영화 ‘의형제’의 모니터 시사회에서 이주여성을 커다란 스크린에서 보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다는 지적이 뜻밖이었다”며 “영화에는 외계인과 괴물도 나오는데, 외국인은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한류의 일방통행식 전파는 곳곳에서 ‘반(反)한류’ ‘혐(嫌)한류’라는 역풍을 낳고 있다. 글로벌 한류를 위해선 우리가 먼저 다문화를 받아들이고, 대중문화의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은 지난해 파리에서 “이제 한류는 프로듀서만 한국인일 뿐 유럽의 작곡가, 중국이나 동남아 출신 가수, 미국의 유통회사와 손잡고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올해 초 시각장애인 앵커가 KBS뉴스 진행을 맡아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외국인 출신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도 하루빨리 보고 싶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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