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촬영 중 인터뷰에 응한 차인표 씨의 말이다. 그는 탈북자 31명의 북송을 막기 위해 중국대사관 앞에 ‘용기 있게’ 섰다. 동아일보 14일자 보도를 계기로 국제 이슈로 확산된 탈북자 북송 위기에 대해 야당과 진보단체, 그리고 정치·이념 지향적 연예인 누구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때였다. 진보진영이 외면한 탈북자인권 거론
‘용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연예계에서도 오로지 좌파 폴리테이너(폴리티션+엔터테이너)들만 목청을 높이는 시대, 독재시절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앞에 나서서 진보 인권 민주라는 가치를 독점한 듯 행세하는 시대, 북한 인권을 입에 올리면 ‘수구 꼴통’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에서, 톱스타급 연예인이 처음으로 ‘보수의 어젠다’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정치나 외교보다 위에 있는 인도주의적 문제”라는 차 씨의 말처럼 탈북자 북송은 이념이나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의 어젠다’라는 필자의 표현도 틀린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보수의 어젠다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진보진영이 한결같이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침묵하는 걸까. 북한을 자극하면 인권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는 그들의 논리를 인정해준다 해도, 그 밑바닥에 깔린 더 핵심적인 이유는 진영논리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사람의 두뇌는 슈퍼컴퓨터보다 빠르게 내 편 네 편을 구분한다. 일단 머릿속에서 진영 편입이 이뤄지면 사안의 경중이 달리 보이고, 내 편과 상대편에 들이대는 잣대의 높이가 달라진다.
중국이 탈북자를 북송하는 것도 진영논리의 산물이다. “난민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의 월경자”라는 억지논리 아래에는 북한정권이라는 ‘우리 진영’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서로를 잇몸과 이의 관계로 보는 강박관념이 깔려있다.
그런 중국을 진보진영은 비판하지 않는다. 만약, 7000명이 넘는 시민을 학살한 중동의 정권을 비호하고, 자기네 어선들이 다른 나라 바다에 들어가 사람을 죽여도 사과조차 하지 않는…그 나라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이슈든 미국이 관계되면 진보진영의 잣대는 달라진다. 한미 FTA에는 사생결단 난리치지만 한중 FTA에는 별 반응이 없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한미 FTA와 비교할 때 한중 FTA가 우리에게 불리하고 위험한 요소가 훨씬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캐나다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되는데도 조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차피 몇십억분의 1 확률의 작은 위험이긴 하지만 광우병 위험을 따진다면 2003년 이래 18차례나 광우병 소가 발견된 캐나다산 쇠고기는 미국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위험하다.
진영논리는 적의 적이면 무조건 내 편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근무평정 최하위권의 판사를 ‘국민법관’으로 치켜세우는 게 한 예다. 소송 당사자들이 다투는 사안에 72자밖에 안 되는 판결 이유를 쓰고, 판결문에 변호사가 제출한 서류를 갖다 붙이는 그런 태도야말로 법원노조 등이 가장 앞장서서 타파해야 할 구시대적 법관상 아니었을까.
“이념보다 인간이 먼저”새겨들어야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던 차인표 씨에게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한국인들은 왜 북송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좀 창피해서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고 그냥 ‘이제 시작이다.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변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필자는 차인표가 좌파인지 우파인지,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 전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사람을 살리고 싶다”며 거리에 나온 그의 착한 마음이 인간의 생명이 걸린 사안마저 진영논리에 갇혀 접근해온 사람들을 향해 “이념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자”고 호소하는 용기 있는 웅변으로 들려 차인표가 돋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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