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아시모프라는 과학소설(SF) 작가가 있다. 올 4월이면 세상을 뜬 지 20년인데, 그의 소설은 아직도 인기다. 이유가 무엇일까. 특유의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일반 작가들의 상상력과는 궤를 달리한다.
겸사겸사,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최후의 질문’이란 소설을 들여다봤다. 워낙 짧아서 인터넷에 텍스트 전문이 떠도는 작품이다. 설정부터 남다르다. 우주의 종말 즈음, 인간은 다 죽고, 스스로 진화하는 컴퓨터 한 대만 달랑 남는다. 곧 사라질 우주를 되살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컴퓨터, 마침내 짤막한 명령을 내린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면서 소설은 끝난다. 신이 아닌 컴퓨터가 우주의 창조주다. 인류의 역사 혹은 기독교의 역사를 단 한 문장으로 거머쥐는 거대한 상상력 앞에서 잠깐 주춤했다. 어디에서 오는 상상력일까.
아시모프는 생물학자다. 컬럼비아대에서 생물학의 한 분과인 생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 인간의 뇌 속에서 자연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합하는 보기 드문 장면에 감탄하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 거의 제국주의에 가까운 생물학의 확장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상상력이 사실은, 생물학적 사고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20여 년 전 고등학교 때, 생물은 네 가지 과학 과목 중 ‘선택’의 대상이었다.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엔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학 중 한 과목을 골라야 했고, 생물학은 그나마 잘 선택받지도 못했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이 생물학이라는 학문은 벌써 그때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상력으로 인문학의 전통적 카테고리들을 허물고 있었다. 한 생물학자가 “사회과학은 가까운 미래에 생물학의 분과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게 이미 1970년대였다. 생물학은 이후 자신의 학문적 ‘야심’을 차근차근 실현하고 있다.
생물학적 상상력의 인문학 잠식은 그렇게 해외 학계에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진화생물학이 종교와 문학의 카테고리를 침범하고, 신경과학이 윤리와 사회학을 자신의 테두리로 끌어들인다. 분자생물학도 인문학의 경계를 종횡무진 헤집는다.
뒤늦은 생물학 찬사는, 이 시대 인문학에 대한 걱정의 이면이기도 하다. ‘인문학의 위기’란 말은 숫제 구문이 됐다. 대중매체에서 ‘인문학’은, CEO들의 이색 취향이나 대기업 사내 강좌 소식 속에서나 등장한다. 변죽만 울리는 형국이다. 위기를 넘어 무력의 단계에 가깝다.
위기 타개의 방책은 어쩌면 인문학의 자기 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문제로 귀결된다 할 때, 인간에 대한 첨단의 이해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 생물학이기 때문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생물학과 생물학적 상상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인문학의 살길 아닌가도 생각된다. 하지만 적극적인 모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생물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초보적이다. 과학정책을 전공한 지인에게 들으니, 몇 년 전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적이 있다고는 한다. 의학전문대학원이 붐을 이뤘을 때다. 대학원 입학에 생물학 공부가 요긴했기 때문이란다. 비키니 차림 여성에 대한 품평에 애꿎게 ‘생물학적 완성도’란 용어가 동원되기도 했다. 생물학적 상상력이 빛을 보기에는 이래저래 척박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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