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포맹학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서울맹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내내 특수학교를 다녔다. 학교생활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글픔을 느낀 적도 자주 있었다. 맹학교를 다니면서 ‘보는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꿈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학 진학을 결심한 이후 학업에 열중했던 것은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과 목표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1986년 1월, 연세대 교육학과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다.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 달성으로 느낀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는 친구’들과 함께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흰 지팡이를 사용해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데 따른 불편은 차라리 예상했던 문제였다. 그러나 목소리만 듣고 친구를 식별하지 못해 야기되는 대인관계의 곤란은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었다.
수업에 필요한 점자도서 또는 녹음도서를 아예 한 권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허탈감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국어와 영어 교재는 잠실에 있는 연합세계선교회 점역실에 의뢰하여 매주 수업 분량만큼 자료를 받아 가며 공부했다. 기타 과목의 경우 필요한 책을 여기저기 나누어 녹음을 부탁했다. 명동에 있던 가톨릭녹음선교회, 대치동에 있던 미문선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녹음을 의뢰했다. 그러다 만난 분이 미문선교회에서 봉사자로 활동하던 장로교 신학대학생 박춘태 형님이었고, 그가 나에게 서울교대 1학년에 다니던 정기원을 소개해 주었다.
정기원은 책을 녹음해 주는 것으로 머물지 않았다. 학과 친구들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해 함께 녹음해 주자고 부탁하여 임영미 김병희 등 여러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해가 바뀌어 맞이하게 된 87학번 후배들에게도 나에 대해 말해 주어 함께 책을 녹음해 주는 동아리를 조직하였다. 87학번 후배 중 누군가가 동아리 이름을 ‘오녹내미말’이라고 지었는데 “오늘 녹음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를 약칭한 것이다. 강상범 고재욱 이소영 이진희 이혜주 등이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마다 서점에서 구입해 ‘오녹내미말’ 회원과 약속한 후 책과 카세트 녹음테이프를 전해 주었다. 내가 서울교대 근처로 갈 경우도 있었고, ‘오녹내미말’ 친구들이 연세대 근처로 와 주는 경우도 있었다. 커피와 함께 빵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연세대 앞 독수리다방이 자주 갔던 약속 장소였다. ‘오녹내미말’은 88학번까지 회원을 모집하여 활동하다가 내가 대학 4학년이었던 89년 봄 무렵부터 각자 학교생활이 바빠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오녹내미말’이 조직된 이후 나는 다른 기관에 책 녹음을 부탁할 일이 없었다. 대학생 시절 읽었던 전공 서적은 거의 모두 ‘오녹내미말’ 친구들이 녹음한 것이었다. 지금 경기 구리시에 있는 밀알두레학교 교장 정기원 선생이 ‘오녹내미말’을 조직해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많은 전공 서적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우연일까? 나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교대와 가깝게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서울교대 정기원 등 ‘오녹내미말’ 친구들이 나를 위해 책을 녹음해 주었듯이 이제는 국가기관인 국립중앙도서관이 책을 읽고자 하는 장애인들에게 개별 맞춤형 대체자료 제작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도서관법이 개정돼 다가오는 8월이면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설립될 것이기에 마음이 설렌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책을 읽고자 하는 모든 장애인을 위한 ‘오녹내미말’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국가기관이 공적 지원 체계를 마련하지 못하던 1980년대 후반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귀한 시간을 나누어준 정기원과 ‘오녹내미말’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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