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창원]총론보다 각론에 강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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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7일 03시 00분


김창원 도쿄 특파원
김창원 도쿄 특파원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의 경제학 전공 교수를 만났다. 그는 한국 학생의 졸업 논문 지도를 하다보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고 했다. 한결같이 ‘큰 그림’만 그리려고 할 뿐 미시적 주제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같으면 관련 논문을 여러 편 쓸 수 있는 주제인데도 한국 학생들은 하나의 논문에 모두 담으려 한다”며 “한국 학생들은 너무 통이 큰 것 같다”고 했다.

교수의 지적을 듣다보니 일본은 정말 거시보다 미시, 총론보다 각론에 강한 나라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일본 서점엘 가면 각론에 강한 일본을 실감할 수 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다양함과 방대함에 주눅이 든다. 독도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 일본 연구자들이 이 정도로 꼼꼼하게 고증하고 연구하나 싶어 ‘이러다 독도를 빼앗길 수도 있겠구나’ 겁이 날 정도다.

일본은 디테일에 강한 나라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이디어 상품이 많은 것도 일본의 디테일 문화와 관련이 있다. 한번쯤 ‘이런 물건이 있었으면…’ 생각하다 잊어버린 것도 이미 일본에 아이디어 상품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완전무결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한 우물을 고집하며 정성과 혼을 쏟아 붓는 일본의 모노즈쿠리(장인) 정신도 디테일한 성격과 맥이 닿아 있다. 이 같은 전문성과 집중성은 패전국 일본이 세계적 경제대국이 되는 무기가 됐다.

하지만 기자는 최근 ‘디테일 강국 일본’에 반문을 제기하는 일이 잦아졌다. 미덕으로 여겨져 온 디테일이 오히려 일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디테일을 높이 평가하는 일본 문화는 큰 그림보다는 작은 그림, 자신의 일과 역할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을 대거 키워냈다. ‘넓고 얕게’보다 ‘깊고 좁게’ 집중하려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답답하리만치 한 우물을 고집하는 자세는 오히려 상황 변화에 대처하는 순발력을 떨어뜨리지 않았나 싶다.

일본 음식점에서 단무지 한 그릇을 추가로 부탁하면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대는 점원들이 그렇다. 점원들의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고객 응대는 감탄스럽지만 매뉴얼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손님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허둥댄다. 고참 점원을 부르고 점장이 나온다. 한참 논의 끝에 나오는 결론은 대개 “매뉴얼에 없으니까 안 된다”이다. 한번쯤 바꿔 생각해도 될 일 같은데도 절차와 전례를 먼저 요구하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에 고지식한 늙은 장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을 때 일본 원전당국도 그랬다. 사상 초유의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했음을 감안해도 이게 세계 최고의 관료가 이끌어온 일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다. 일본에는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원전 과학기술자가 즐비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의 연구 분야에만 칸막이를 친 전문가였다. 맡은 분야에서는 최고이지만 칸막이를 넘어가니 모두 초보자처럼 허둥댔다.

하마다 준이치(濱田純一) 도쿄대 총장은 동아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 사회의 인재상을 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는 많아도 이를 종합적으로 보고 연관지어 판단할 줄 아는 그랜드 디자이너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디테일 문화가 글로벌 경쟁시대와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디테일 없이 큰 그림만 그리려는 자세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원전사고 이후 1년 동안의 일본을 보면 예기치 않은 사건이 잦고 변화가 빠른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전체의 흐름을 읽고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디테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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