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탈북자 문제가 중국 외교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한국 외교통상부는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은 국제난민협약을 위배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연일 탈북자 관련 질문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다. 베이징은 탈북자가 난민이 아닌 불법 월경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원칙이 중국 정부가 처한 도덕적 곤경을 해소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탈북자 문제로 외교적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탈북자의 생명과 존엄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견지해 온 대북정책 때문이다. 베이징은 탈북자 북송이 한국의 인권운동가나 정부뿐 아니라 서방 언론의 거센 인도주의적 비판을 초래할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북송 탈북자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북송을 거부한다면 이는 평양과의 정치적 결렬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베이징이 평양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중국에 들어온다. 그들은 북한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탈북자들의 운명을 다룬 바버라 데믹의 ‘Nothing to Envy; Love, Life and Death in North Korea’가 중국에서 번역 출판돼 많은 사람이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의 운명에 동정을 갖게 됐다. 사실 많은 중국인은 탈북자 강제 송환을 반대하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베이징대에서도 많은 학생이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의 운명을 심히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정책에 결정적인 변화가 도래하지 않는 한 중국 정부가 탈북자 송환을 전면 중지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중-북 국경은 1300km에 이른다. 변경 지역의 경비 태세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그리 치밀하지도 않다. 만약 베이징이 탈북자를 강제 송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국경만 넘어오면 중국에서 새 삶을 찾게 된다”고 선전하는 것과 같다. 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의 정부를 버리라며 공개적으로 그들을 부르는 격이 된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돌이켜보자. 동독 주민들은 장벽을 넘으며 낡은 체제와의 결별은 곧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서독이 그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자 동독은 물론이고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홍수에 쓸리듯 붕괴해 버렸다. 이런 상황이 중-북 국경지대에서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베이징은 평양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인권 문제로 취한 조치가 종국적으로 평양정권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초래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중-북 국경을 개방해 공개적으로 북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게 중국이 평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생각해 왔다. 베를린 장벽은 이를 충분히 증명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동북아의 안전이 모종의 지역적 협력 시스템으로 승화되지 않는 한 베이징이 먼저 나서서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종결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베이징은 동북아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북한 정권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적극적인 수단을 찾을 수 없다.
탈북자 강제 북송은 베이징의 한반도 정책이 인권과 지역적 이익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를 감안해 베이징은 지난 10년 동안 선택적으로 탈북자를 송환해왔다. 그럼에도 평양의 붕괴를 원치 않고 있다는 베이징의 기본 원칙을 보여주기 위해 북한으로 송환시킨 이들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연민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해서 중국의 양심을 가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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