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의 철학자들은 글 말고도 자신의 철학을 건축과 원림(園林)으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의 철학을 자세히는 몰라도 그들이 자신의 철학으로 어떤 삶을 추구했는지는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자신의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한 그림을 그렸고, 그 원리에 따라 건축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상의 언어를 구성한 글이 있었고, 그 글은 다시 2차원의 그림으로 재현되었으며, 다시 3차원의 공간 속에 표현되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정보를 부호화하는 데 능했다는 말이다.
경북 안동의 낙동강가에 있는 도산서당은 그 대표격으로, 500년 전 퇴계 이황(1501∼1570)의 사상을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낭독해 주고 있다. 도산서당을 걷는 것은 퇴계의 철학서를 읽는 것과 같다. 세 칸의 단출한 집인 도산서당을 그 뒤쪽의 도산서원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퇴계학파의 방대한 저작을 살피기 위해서는 분명히 그 시원이 되는 저술을 따로 뒤적여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이라는 퇴계의 저술을 바탕으로 거기에 주석을 달고, 해석하며, 발전시킨 퇴계학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서애 유성룡부터 시작하여 근처의 임청각을 지은 고성 이씨들까지 안동지역 유림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방대한 계보가 그대로 도산서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 칸짜리 도산서당은 그 핵심이고 상징이다. 퇴계 생전의 건물로서는 제자인 정사성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바친 역락서재와 기숙사인 농운정사가 있고(농운정사의 기본설계 역시 퇴계의 작품이다), 도산서당과 관리시설인 하고직사까지 네 채가 전부다. 퇴계 사후 도산서원의 건립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가 월천 조목이다.
퇴계 팔고제(八高弟) 중의 한 사람인 조목이 퇴계의 숨결과 손길이 하나하나 밴 도산서당의 배치에 새로이 도산서원을 앉힌 방법은 놀랍게도 도산서당과 그 외의 건물들을 과감히 양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원래 도산서당의 건물들은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으로 들어가는 접근로에 의해 끊겼다. 아울러 지금의 하고직사 위쪽으로 새로 들어서는 서원의 영역을 한정하면서 동편의 서원과 도산서당 사이의 화계에 의해 도산서당은 더욱 독립적인 공간이 되었다. 청출어람이다. 철학의 정원에서 하는 감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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