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김영준]스페인 산티아고 여정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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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9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지난 연말 연초에 이란을 다녀왔다. 그전부터 잡힌 계획이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급작스레 방문하게 됐다. 15년 전쯤에도 이스파한이라는 이란의 도시를 가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도 미루다가 결국 일정이 취소되었고 크게 후회했던 경험이 있어 이번엔 일단 초청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정을 결정하고 난 뒤 외신에서 접하는 이란 상황은 난감함의 연속이었다. 간통한 여인을 돌을 던져 처벌한다는 소식(나중에 교수형으로 바뀌었다)에서 시작해, 이란 청년들의 테헤란 주재 영국대사관 점령, 핵개발과 관련한 이스라엘의 연말 연초 폭격설, 이란 대학생들의 인간 방패(하필 이스파한이었다),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는 혁명군의 무력시위, 미국의 항공모함 대응, 그리고 유가와 경제의 암울한 전망까지…. 연일 불안감을 증폭하는 소식이 이어졌다.

방문을 취소해야 할지 고심했다. 이란의 초청자와 여러 번 접촉해 보았지만 일정이 취소되거나 변동될 가능성은 없었다. 사실 이번 여행은 몇 군데 도시에서 강의를 하면 모든 비용은 물론이고 젊은 건축가 가이드와 기사 딸린 차량까지 제공해 준다는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이란이란 곳은 호기심과 기대치까지 있는 곳이기에, 불안함 속에서도 한번 가보자 하는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됐다.

주변의 만류가 뒤따랐다. 그러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10여 년 전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캄보디아 톤레사프 호수를 방문했는데, 인근 마을의 평균 수명이 40세쯤 된다고 했다. 배 위에서 나는 이제 막 문을 연 건축사무소의 앞날을 구상하는데, 내 또래의 사내는 석양을 보면서 인생을 정리하던 그 장면. 그리고 작년 한 해 베를린 전시를 준비하느라 무수히 바라봤던, 건축가 고 김수근 선생님의 수제 다이어리도 다시 보게 됐다. 그분은 생전에 2011년까지의 계획을 빽빽이 세워 두셨던데, 그해가 사후 25년이 되리라는 걸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셨을까. 그분의 1986년도 마지막 병상은 어떤 아쉬움의 자리였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앞만 보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늦게 이뤄지는 분야라 이제 막 자리를 잡았고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아 일상의 작업 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필립 존슨 등 앞선 건축가들처럼 삶의 마지막까지 현역에 있다가 사라지려는 막연한 계획만 있었다. 항상 다음번 작업이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살았다. 버킷 리스트, 그런 건 언제든지 실행하면 되는 거라고 무시했다. 무엇보다 당장의 짐들이 버거웠다.

나에게 ‘죽기 전에 이것만은’은 정말 무엇일까. 어린 시절 읽었던 김찬삼 여행기에 나오던, 오토바이와 안데스 산맥과 원주민 처녀에 대한 기억. 아프리카와 사막과 랜드로버의 기억. 아내의 약을 사러 나갔다가 친구 따라 금강산을 다녀왔다는 조선시대 한 시인에 대한 기억. 돌이켜 보면 무작정 떠나고 싶은 꿈들이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변색되었고, 대부분 비슷한 상황의 대안으로 만족하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여정을 마무리해야겠다는 현실적인 꿈을 꾼다. 오래전 앞뒤로 이틀씩만 걸어 보았던. 그때는 모두 중세시대 복장을 한 수도자의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가벼운 피크닉 복장으로 그 길을 걷는다고 한다. 누구는 삶을 마무리하러 가고, 누구는 삶의 시작을 찾아서 온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만날 책 속에서만 걷는다. 800km의 도보 순례, 40일의 시간과 체력, 그게 쉽지는 않다.

참, 이란 여행은 너무도 평온했다. 매일 밤 CNN에서는 일촉즉발 전쟁의 가능성을 얘기하고, 내 머리 위로 미사일이 날아갔다고 얘기했지만, 길거리는 활기찼고 페르시아 도시와 건축은 너무도 근사했다. 호르무즈 섬에서도, 이스파한에서도 카샨과 테헤란에서도, 이란 사람들은 순박했고 아름다웠고 일상의 소소한 일로 각자 분주했다. 히잡도 루이뷔통 브랜드가 있었다. 모두 대장금 얘기를 했고, 아이패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밤마다 이방인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내어 주었다.

김영준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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