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 신도시에 사는 공무원 L 씨. 도심 직장에 출근하느라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난다. 퇴근은 오후 9시경. 어떤가. 일중독일까, 아니면 내 처지나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경우인가. 이런 30대 후반 보통 한국 남자의 일상이 한 서양인 기자에겐 특별하게 비쳤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나라들’이란 기사를 런던발로 ‘포브스’(경제전문지)에 썼다. 2008년 5월의 일이다.
거기에 소개된 L 씨의 일상은 이랬다. 귀가는 오후 11시쯤이고 샤워하고 나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가 몇 시간 후 다시 일어나 출근했다. 이런 ‘보통의 일과’가 그 서양 기자에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뿐이었을까. 이런 일상이 일주일에 6일씩, 그리고 거의 연중 내내 계속된다고 L 씨는 별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런 중에서 서양 기자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휴가였다. 당시 L 씨는 ‘딱 사흘’ 쉬었다고 말했다. 휴식이 서양인에게 노동의 최고 가치이자 궁극의 목표임은 불문가지. 타히티 섬의 한 프랑스인 호텔 간부의 말인데 한국인의 연간휴가가 일주일이라고 하자 대뜸 “아니 도대체 왜 살아요, 일은 왜 하고. 인생을 즐기지도 못하는데….”
L 씨의 초인적인 노동 현실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이들요? 일주일에 한 10분이나 15분쯤 볼까요? 그것도 주말에나 가능한데 그나마 출근할 때도 많아 어려워요.” 가끔은 집 대신 사무실에서 쪽잠도 잔다는 말에 서양 기자는 그를 워커홀릭(일중독) 같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이런 직장생활이 한국에서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덧붙였다.
그 근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낸 ‘2357’이란 한국인의 연간 노동시간(2006년) 통계였다. 기자는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6시간 반씩 일하는 셈이라며 OECD 가입국 중 최고라고 소개했다.
이 통계가 곧 우리의 행복지수임을 확인한 것은 요 며칠 전이다. 한국인의 삶의 지수가 32개국 중 31위라는 OECD 자료에서다. 순위는 미국 미시간대의 WVS(World Value Survey·세계가치조사)팀이 1981년부터 2008년까지 5회에 걸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행복지수가 토대. 일과 삶에 대한 만족도, 사회적 신뢰, 정치적 안정, 포용성, 환경, 소득 등 10가지가 동원됐는데 한국인은 10점 만점에 6점대 초반이다.
2008년 포브스의 기사에는 한국인의 미래에 대해 상반된 견해가 교차했다. 부정적인 건 서양 기자였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그가 하는 일에서 온다’는 마이클 브린(‘한국인’의 저자)의 말까지 인용하며 이런 노동문화가 삶에 너무도 깊이 뿌리내려 변한다 해도 느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히려 L 씨가 긍정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시간과 스트레스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근로습관은 상사 눈치부터 살피는 직장문화에서 온 건데 우리도 변하고 있으니 나아지지 않겠는가”라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이 기사를 읽은 지도 4년이 가까워온다. 현 시점에서 두 사람의 전망을 살피건대 서양 기자가 옳았다.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이고 10만 명당 자살률(31.2명·2010년)까지도 최고다.
총선바람에 온 나라가 들떠 있다. 정치의 궁극은 행복인데 그게 우리에겐 그리도 요원한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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