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한 번의 투표로 대통령에 복귀하기 사흘 전, 나는 모스크바 교외 총리관저에서 푸틴 씨와 마주하고 있었다. 영국 더 타임스, 프랑스 르몽드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의 신문 편집간부들과 함께 여섯 명이 공동 회견을 한 것이다.
선거 직전에 이런 회견이 마련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안 그래도 선거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가운데 이 회견이 선거운동에 이용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선이 확실한 권력자를 상대로 마련된 이런 기회를 외국 언론이 외면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6명은 푸틴 씨와 마주했다.
그랬던 만큼 질의가 팽팽한 정면승부였던 것은 당연했다. “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재선은 안 되는가.” “작년 하원선거 부정으로 여당은 도둑 당, 사기꾼 당으로 불리고 있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는 후보자가 장기간에 걸쳐 모든 것을 드러내 벌거숭이가 되는데, 당신도 벌거숭이가 될 생각은 없는가”라는 식으로, 특히 유럽 신문들의 질문이 신랄했다.
푸틴 씨도 지지 않았다. “메드베데프와는 이전부터 지지율이 높은 쪽이 출마하기로 약속했다.” “도둑이라는 둥의 말은 권력을 공격하기 위한 신랄한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벌거숭이가 될 생각이 없다.” 가끔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피하지 않고 답변을 이어갔다.
외교 문제의 초점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시리아에 대한 규탄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러시아의 대응이었다. 푸틴 씨는 “유럽과 미국 언론은 시리아에 대해 치우친 정보밖에 전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시리아 정부는 러시아제 병기를 사용하는 것 아닌가”라고 공격하자 “물론 우리는 무기를 팔고 있지만 시리아와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영국 등이 훨씬 깊지 않은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제일 먼저 방문한 것도 유럽 각국이었다”고 되받아쳤다. 유도 용어로 북방영토 협상 시사
바야흐로 나에게도 승부처가 다가왔다. 메드베데프 씨가 대통령으로서 처음 북방영토를 방문하는 등 최근 일본과 러시아 간에 얼어붙은 북방영토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은 지난해 대지진 때 쇄도한 러시아의 지원에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게 예의일 법.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일-러 관계를 테이블 위에 올리기로 한 것은 하나의 작전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푸틴 씨는 유도를 아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꺼내면서 “당신이 영토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은 예의 바른 처사다”라고 했다. 푸틴 씨의 외교적 수사일지 모르지만 동양적 정서가 통했던 것 같다. 오히려 푸틴 씨가 먼저 영토문제를 언급하며 “최종 타결을 목표로 경제협력부터 진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영토문제와 관련해 대담한 한 걸음을 뗄 생각인가” 하고 묻자 “유도인은 대담하게 움직이지만 이기는 게 아니라 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답했다. 이어 “영토문제도 이른바 유도의 ‘히키와케(引き分け·무승부)’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며 일본어를 직접 인용하는 것이었다. 통 큰 타협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내가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대에 북방영토 교섭은 4개 섬 전체가 대상이라고 인정했던 1993년 도쿄선언을 언급하자, 푸틴 씨는 1956년 일-소 국교 회복 공동선언에서는 2개 섬 양도밖에 약속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래서는 모처럼 나온 ‘무승부’의 의미가 4분의 2에 그칠 수밖에 없고 4도 반환을 열망해온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즉각 ‘무승부라면 2개 섬으론 부족하다’고 맞섰다. 그러자 푸틴 씨는 파안대소하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당신은 외교관이 아니고 나도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양국 외교부를 불러 ‘하지메(はじめ·경기 시작을 지시하는 유도 용어)’ 하고 구령을 붙이겠다.”
또 유도 용어를 인용하며 협상 개시를 명하겠다는 것이다. 2개와 4개 사이에 무승부로 한다면 3개 섬이라는 계산이 나오지만 그런 낙관적인 관측은 별도로 하고 어쨌든 얼어붙은 공기를 되돌려 협상 테이블에 나오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은 틀림없다.
‘히키와케’ 철학 살리면 평화 가능
푸틴 씨가 자꾸 유도 용어를 인용한 것은 같은 유도 애호가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를 의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다 씨도 푸틴 씨의 당선이 결정되자 즉각 축하 전화를 해, 함께 ‘하지메’라고 구령을 붙이자고 호응했다. 앞으로의 전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양국이 서로 다른 주장만 거듭해 최악의 상황에 빠진 영토문제를 냉정한 협상 테이블에 다시 올리는 계기가 됐다면 나도 추운 모스크바까지 간 보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는 것이 아니고 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푸틴 씨가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인지 어떤지는 별도로 하고, 그가 말한 ‘히키와케’의 철학을 여러 나라가 살릴 수 있다면 세계는 틀림없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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