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IQ, EQ, 그리고 ‘눈치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16일 03시 00분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1990년대 초 세브란스병원에서 연구강사로 근무하던 때다. 대형 국제학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나를 포함해 젊은 의료진이 학회 진행요원으로 차출됐다. 행사 마지막 날, 학회 참석자들은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경기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관광을 떠났다. 남산1호터널을 지나면서 나는 이날 점심으로 준비한 햄버거 세트 개수를 확인했다. 내가 담당한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40명이었는데, 햄버거 세트는 30개뿐이었다. 당시 내 월급은 70만 원 정도로 월세를 내기도 버거웠는데 지갑에는 일주일 생활비인 3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휴게소에 버스를 세우고 지갑의 돈을 다 털어 휴게소표 햄버거 세트 10개를 샀다. 외국 손님들에게는 미리 준비한 ‘브랜드’ 햄버거를 대접하고, 한국 사람들에게는 휴게소표 햄버거를 나눠 주었다.

민속촌에 도착하자 다른 버스에 타고 있던 선배 교수가 부리나케 달려와 햄버거가 부족한데 어떻게 해결했는지 물었다. 급한 대로 사비를 털어 햄버거를 긴급 조달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인요한, 너 보통 놈 아니구나” 하며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다른 버스에서는 햄버거가 부족해 한국 사람들은 쫄쫄 굶고 외국 손님들만 햄버거를 먹은 까닭에 분위기가 영 어색했다는 전언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선배 교수가 병원장을 지내는 등 여러 중책을 맡을 때마다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버거운 총애를 받았다.

한국에서 의대를 다니는 사람들은 지능지수(IQ)가 모두 일정 수준을 넘는다. 하지만 의사로 살아갈 때는 IQ뿐 아니라 감성지수(EQ)가 필요하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의사는 남이 어떻게 아픈지, 뭘 원하는지를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무척 중요하다. IQ와 EQ를 갖추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지만 한국처럼 조직생활이 중요한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이 능력은 ‘눈치큐’다.

전남 순천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현장 경험을 통해 ‘눈치큐’를 체득했다. 가깝게는 내 위로 형 4명에게 어떻게 하면 안 맞을 수 있을지 피해나가는 눈치를 배웠다. 친구들 집에 놀러가서는 어른의 눈치를 보는 법을 익혔다. 좁은 방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저녁에 그 집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놀러온 서양 아이인 나까지도 벌벌 떨면서 조용히 피해야 했다. 온종일 고생하다 일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피해 있도록 어른들이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치큐를 임기응변을 위해서만 사용하면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선배 교수가 훗날 의료원장 선거에서 떨어지고 크게 낙담했을 때 나는 병원에 사표를 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치큐에는 이처럼 ‘순정과 의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요즘 많은 어른들은 공부만이 지상가치라고 가르친다. 좋은 대학과 번듯한 직장에 보내기 위해 때로는 편법이나 불법을 아이들 앞에서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서라고 말한다.

인생의 성공은 외면적 조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진심을 갖고 남의 눈치를 살필 줄 아는 능력, 다시 말해 배려하는 것을 넘어 남이 생각하기도 전에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앞에다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재주가 결국엔 차이를 만든다. 나는 좁은 아랫목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이 능력을 배웠다. 한국 사회가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지만 내가 세브란스병원에서 21년째 국제진료소장을 맡는 등 ‘한몫’을 할 수 있었던 성공의 비결은 ‘눈치큐’에서 비롯됐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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