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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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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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뱅이 아버지, 어느새 나의 캐릭터로…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soojin@donga.com
삶을 돌아보면 성공과 실패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도 그저 충분하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가장 가깝고도 먼 사람, 내가 가장 닮은 사람, 바로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집에 가끔 들어오셨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바깥에서는 늘 바쁘셨지만 도통 가정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술 드시고 벌게진 얼굴로 통금이 끝난 새벽에 들어오시면 환한 대낮 종일토록 주무시고는 또 어디론가 나가셨다.

그러나 이상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적어도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학교에서 다양한 친구를 만나면서 서로 다른 가정환경을 보고 듣게 됐다. 잘사는 친구들이 자랑하는 든든한 부모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 아버지와 슬슬 비교가 됐던 것이 화근이었다. 학교도 못 나온 무식하고 나이 많은 아버지, 언제나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가난한 아버지가 부끄럽고 창피했다. 가끔씩 아버지의 주먹질에 상처 입고 이불 속에서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무수히 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의 반항은 침묵이 되었다.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는 오랫동안 끈질기게 지속됐다.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함께 살아도 눈을 마주치는 적도 별로 없었다. 그땐 왜 그렇게 아버지가 밉고 부끄러웠을까.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 없는 지금은 철부지 그 마음이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른다. 부모가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던가. 바보같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부자상을 그리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 무뚝뚝함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부족함이 내게 남다른 부분을 성장하게 했던 것을 그땐 몰랐다.

광복과 전쟁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겪으신 아버지 세대의 어른들은 극도의 불안과 죽음의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남으셨다. 격동의 긴 세월이 그분들의 배움이자 교훈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분들을 결정지을 수 없다. 학교가 아니면 어떻고 돈이 아니면 어떤가. 아버지란 이름 자체가 나를 있게 해 주었고 그토록 지우고 싶던 그 그림자가 내 인생을 여기로 이끌어 온 것인데.

연극을 만들면서 어느새 나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를 만나곤 한다.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내 인생의 깊은 그늘이었던 아버지는 어느새 나의 캐릭터가 된다. 신기하게도 그 이상한 캐릭터가 내 힘의 원천이 된다. 아버지가 충족시켜 주지 않았던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젊은 날을 좌충우돌 격정적으로 살았다. 우리가 겪었던 청춘, 낭만과 아픔투성이였던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풋사랑, 보이지 않는 계급, 정권과 사회와의 싸움, 자유를 향한 의지와 투쟁, 예술과 철학에 대한 토론, 노동과 지성이 뒤엉켜 빠르게 변하는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달려 왔다. 절대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술이 오히려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벗이 되고 우리들의 정서를 휘젓는 촉매제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가정과 사회의 책임을 떠안고 얼마나 외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는지 나도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지금 나의 아이들은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저들만의 세상에서 나를 바라볼 때 마치 내가 우리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부모라고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광야 같은 땅에서 스스로 잘 헤쳐 나가는지 늘 염려하는 아비의 마음을 지금은 모르겠지….

아버지의 산소에 가면 꼭 술을 따라 드린다. 아버지, 저 역시 못난 아비가 되었지만 이게 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역시 아버지 덕분입니다. 당신이 저의 땅이고 하늘입니다. 아들에게 먼저 살갑게 대하시기 쑥스러우셨던 미안함과 아버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이 바람결에 전해온다.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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