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권지예의 그림읽기]비상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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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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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이흥덕. 아트블루 제공
‘비상구’. 이흥덕. 아트블루 제공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게 무슨 구경인지 아세요? 구경 중에 재미있는 게 불구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사람구경입니다. 시내에 외출할 때면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저는 종종 사람구경을 하곤 합니다. 어느 시간대에 지하철 객차 한 칸에 노선만 같을 뿐 연령, 성별, 직업, 생활 정도, 교육 정도가 각양각색인 도시인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게 참 흥미롭습니다. 지하철은 지하의 또 다른 세계이지요. 출퇴근 시간대의 아비규환으로 한때는 지하철을 지옥철로 부르기도 했지요. 한가하고 나른한 오후 시간대에는 단돈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온갖 물건을 들고 잡화상들이 오르내리고, 심야의 지하철 안에는 취객들과, 밤새 떨어지기 싫은 연인들이 꼭 달라붙어 있기도 합니다.

예전에 지하철에서 저는 기초화장부터 색조화장까지 하던 ‘화장녀’를 본 적도 있어요. 그 여자는 지하철 좌석에 거울을 세워놓고 쭈그리고 앉아서 마스카라를 칠하기까지 하던걸요. 화장이 끝나자 일어서서 출입문 유리를 전신거울로 삼아 빗을 꺼내 머리도 빗고 뒤로 물러났다 다가왔다 하며 옷매무새를 꼼꼼히 살폈는데, 자신을 쳐다보는 남들의 이목은 전혀 살피지 않는 ‘얼굴이 두꺼운’ 여자였지요.

지하철에서는 가끔 다툼이 생기는데, 노약자석이 있는 칸은 패권다툼의 주무대입니다.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모종의 암투가 벌어지곤 합니다. 암투로만 끝나면 다행이지만 실제로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지하철 막말남, 막말녀, 폭행남, 선빵녀 등 지하세계에서 폭력이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귀여운 아기를 만졌다가, 실수로 구두를 밟았다가, 공연히 말참견을 했다가는 어떤 수모와 폭력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저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귀머거리 30분, 벙어리 30분은 기본입니다. 그래선지 나서서 중재를 하는 승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몰래 동영상을 찍어 나중에 인터넷에 올려 댓글로 망신을 주는 사이버 복수나 하면 다행이죠.

이런 폭력뿐 아니라 성폭력이나 성추행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도 지하철입니다. 얼마 전에 체구가 큰 10대 청년이 어린 여중생을 추행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열차 안에서 작은 여자아이를 꼼짝 못하게 감싸 안고 못된 짓을 했는데, 겁에 질린 여자아이가 주변의 승객들에게 눈짓으로 위험신호를 보냈는데도 모두 모른 척했다는 거예요. 겁에 질린 여자아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신고를 했다는군요. 그 어린 소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주위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어도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또 어땠을까요. 그 순간, 비상구 표시는 있지만 비상구를 찾을 수 없는 밀실에 갇힌 공포, 또는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때처럼 비상구 표시를 보면서도 질식사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 그림은 한 소녀가 늑대에게 쫓기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비상구는 반대쪽이군요. 군중 속의 말풍선엔 ‘말없음표’만 계속 이어지고, 사람들은 불온한 침묵으로 폭력적 사태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위선적이며 다중인격적인 표정 속에서 분노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도시인들의 저 섬뜩한 눈빛을 좀 보세요. 이 그림이야말로 도시 이면의 폭력적 현실을 불안하게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닐는지요. 쫓기고 있으나 비상구를 찾지 못하는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절묘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나요?

권지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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