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의리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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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9일 03시 00분


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조폭을 당장 열 받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양아치’다. 의리도 없고, 주먹도 못 쓰면서 서민들한테 ‘삥’이나 뜯는 양아치와 동급으로 간주될 순 없다는 거다.

민간인 불법사찰에 청와대가 관련됐다는 새 폭로보다 놀라운 건 비서관이 총리실에서 상납을 받아 왔다는 주장이었다. 관련 컴퓨터를 파기해 유죄를 선고받은 장진수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 따르면, 그 방에 나오는 특수활동비 400만 원 중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에게만 120만 원을 주고 나머지 280만 원을 대통령실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 200만 원, 조재정 행정관 50만 원, 최종석 행정관 30만 원으로 갈라 2년간 바쳤다고 했다.

게다가 컴퓨터를 없애라고 지시했다는 최종석은 평생 먹고살게 해준다더니 의리 없이 주미대사관으로 나가 지금 잠적한 상태다. 이영호는 입막음용으로 2억 원도 아닌 2000만 원을 쩨쩨하게 전하고는 모른 체했다는 주장이다.

청와대 일각에서 양아치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폭로가 터무니없다면, 대통령실장은 당장 장진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마땅한데도 조용하다. 그냥 있자니 국민이 사실로 알 테고, 나서자니 그럼 청와대가 증거인멸을 시킨 건 맞다는 의미로 보일 판이니 난감할 터다. 이런 황당한 상황을 보니 전에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했던 조폭 누나 같은 말이 생각난다.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민간인 사찰 ‘몸통’이 누구냐

더 난감한 쪽은 검찰일지 모른다. ‘윗선’을 찾아내라는 성화에 떠밀려 내일 장진수를 소환해 재수사한다지만 다음 타자 최종석 이영호가 입 다물면 그만이다. 간신히 두 사람을 증거인멸 교사 혐의로 기소한다 해도 국민이 납득할 리 없다. 야권과 적잖은 국민이 사찰을 지시하고 보고받은 ‘몸통’은 따로 있다고 인식하고 있어서다.

진실로 이영호 혼자 과잉충성으로 한 일이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 시절 옷로비 사건은 실체 없는 로비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청와대는 늘 아니라고 잡아떼다 양치기 소년처럼 돼 있다. 더구나 인식이란 팩트(fact)와 상관없는 괴물이다. 2010년부터 거명되다 급기야 다이아몬드 투자 구설수에 오른 ‘왕차관’(박영준)과 장롱 속에 수억 원이 있다고 고백한 ‘형님’(이상득)까지 밝혀내지 못하면 검찰만 개혁의 칼날을 맞을 게 뻔하다.

의혹이 속 시원히 규명되지 않을 때 뭔가 공정치 못하다는 의심과 분노가 치솟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꼼수다’ 팟캐스트가 판을 치고, 그런데도 공정사회를 외친 이명박(MB) 정부에 2040세대는 더 분노한다. 당연히 야권엔 선거용 호재다. 재수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특검이나 국정조사 요구를 할 것이다. “이러자고 당시 민정수석 권재진이 법무부 장관에 앉았느냐”며 사법부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선까지 집요하게 정권 심판론을 외쳐댈 게 틀림없다.

2007년 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그랬다. 국정원 태스크포스에서 MB 처남의 부동산자료까지 파헤친 사실이 드러났다며 민간인 불법사찰 배후를 거세게 캐물었다. 당연히 국정원은 잡아뗐지만, 김영삼 김대중 시절 민간인까지 도청을 했던 사실이 2005년 뒤늦게 밝혀진 바 있다.

작년 1월 박영준 당시 지식경제부 차관도 “청와대의 하명으로 정권에 위해가 될 수 있는 인물을 사찰하는 관행이 37년”이라고 했다. 권력을 아는 쪽에서 보면 잘못은 민간인 사찰 자체가 아니라 들켰다는 데 있는지 모른다. 그런 오랜 관행, 2040세대 용어로는 ‘꼼수’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걸 MB 정부가 모르는 게 문제다. 법치를 말하면서 자신들은 반칙과 특권으로 살아온 그 꼼수를 버리지 않고는 정권 재창출은커녕 ‘형님’을 제대로 모시기도 힘들 수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전당대회 돈봉투’ 관행 때문에 박희태 국회의장은 물러났다. 만일 그가 돈봉투 설이 나오고도 한 달 이상 끌게 아니라 “관행이지만 잘못됐다. 내가 깨끗한 정치풍토를 만드는 발판이 되겠다”며 바로 물러났다면 뒷모습이라도 아름다웠을 것 같다.

“나를 밟고 가라”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다음 정권까지 국민적 에너지를 소모시킬지 모를 민간인 사찰도 MB가 실용적 결단을 내리면 빠른 수습이 가능하다. 한보사건으로 들끓던 1997년 김영삼 대통령처럼 나서는 것이다. 2월 25일 취임 4주년 담화에서 YS는 “제 자식이 책임질 일이 있다면 응분의 사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했다. 결국 대검 중수부장이 갈리며 재수사를 해 ‘몸통’을 밝혀낼 수 있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너무나 멋있는 왕 이훤이 “바를 정(正)…저의 순리는 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정치는 잘못된 관행부터 잡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가 의리도 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한 채 제 잇속만 차리는 집단이라고 믿는 2040세대와도 화해할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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