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1월 어느 날. 일과를 마친 서울 중구 신당동 한국전력 배구단 숙소는 조용했다. 오후 9시가 넘었을까. 후배가 수화기를 건넸다. 선생님이었다.
“친구들과 있는데 술값이 없다. 15만 원만 마련해 와라.”
당시 내 월급이 17만 원이었으니 술값치곤 거금이었다. 근처 식당, 약국 등을 돌며 돈을 빌렸다. 고참이 이런 일까지 해야 되나 싶었다. 짜증을 누른 채 이태원에 있는 술집을 찾아갔다. 돈은 ‘미끼’였다. 선생님은 “그냥 오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았다”며 본론을 꺼냈다.
“선수 그만두고 코치해라.”
“저를 믿습니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육군배구단(현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한전에 입단한 게 1980년 4월. 마르고 닳도록 선수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1983년 5월 결혼한 뒤에는 더 그랬다. 하루빨리 일반 직원으로 새 출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찍 회사원으로 자리 잡아야 승진에도 유리할 것 같았다. 그러다 이듬해 1월 ‘백구의 대제전’이 시작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리그가 출범하는 것이었다. 딱 2년만 더 선수로 뛰자고 결심한 상태였다.
선생님의 코치 제안이 모든 것을 바꿔 놨다. ‘술값 사건’ 다음 날부터 후배들을 지도했다. 1995년 9월 삼성화재 감독이 돼 팀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코치로 양인택 선생님을 모셨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 그게 선생님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그보다 훨씬 더 일찍 그만두려 했던 배구를 계속하게 한 분도 선생님이었다.
스카우트돼 입학한 성균관대 4학년 2학기 때 나는 현대건설 자회사인 동서산업에 입사했다. 졸업하면 배구를 그만두고 다닐 생각이었다. 지금은 프로팀이 6개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 실업팀은 한전, 금성배구단(현 LIG손해보험), 종합화학(해체)뿐이었다. 매년 3, 4개 대회에 출전하는 게 전부라 1년에 절반 이상을 놀았다. 배구에 인생을 거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대학 1학년 때 다친 허리 탓에 면제될 줄 알았던 군대가 배구와 인연을 끊는 것을 막았다. 졸업을 앞두고 육군배구단에서 불렀다. 회사를 휴직하고 군인 신분으로 배구를 계속했다. 당연히 제대하면 복직할 계획이었다.
계획은 어긋났다. 제대를 앞두고 선생님이 한전에 오라고 하셨다. 스카우트 비용 마련이 쉽지 않았을 텐데 2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한전에 입사해도 회사원이 될 테니 몇 년 더 뛴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큰돈을 보니 솔깃하기도 했다. 결국 선수를 계속한 것도, 지도자를 시작한 것도 다 그분 덕이다.
삼성화재에서 감독 제의가 왔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축하할 일이지만 조금 있으면 네가 한전 감독이 될 텐데 평생직장 포기하고 옮겼다 잘못될까 걱정이다.”
지원을 잘해 주는 팀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내 뜻을 선생님은 더는 막지 않으셨다. 이듬해 코치가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는 데리고 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신영철(현 대한항공 감독)을 보내주기까지 하셨다. 다른 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선수로도 뛸 수 있게 이적동의서까지 챙겨주셨다.
공교롭게도 삼성화재가 창단 후 처음 나간 1996년 4월 종별선수권대회의 첫 상대는 한전이었다. 그 대회에서 삼성화재는 1승 4패를 했다. 유일하게 이긴 팀이 한전이었다. “제자의 데뷔전이라 봐준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럴 리 없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그만큼 선생님은 내게 아낌없이 베푸셨다. 2000년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을 때 해외에 있어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선생님! 덕분에 29년째 지도자로 코트에 서 있습니다. “믿어.” 그 한마디가 지금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이번 시즌에는 5년 연속 우승에 도전합니다. 지켜보고 계시죠? 인생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말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립습니다, 양인택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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