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진영에서 백낙청 씨는 ‘2013년 체제’라는 원대한 목표를 내걸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거기에 경제학적 실탄을 제공했으며 조국 서울대 교수는 지성적 외모, 작가 공지영은 여성적 섬세함을 바탕으로 트위터를 장악했다. 백낙청을 빼고 장하준, 조국, 공지영은 1963년생이거나 1982년 학번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배워 운동을 한 세대이자 나이키 신발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처음 접한 세대다.
조국과 공지영의 인기와 이면
나는 대학 신입생 때 이화여대 축제에 갔다가 이대생들이 잘생긴 조국 얘기를 해서 그가 누군지 처음 알았다. 나중에 대학원에서 ‘국가론’ 수업을 듣다가 어찌어찌해서 소비에트 법 이론에 대해 쓴 그의 석사학위 논문까지 읽게 됐다. 법치를 부르주아적 개념으로 몰아세우고 법은 국가의 도구여야지 정책 입안자에 대한 제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을 다룬 논문이었다.
그가 형법 교수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미국에서 영미 형법을 공부한 사람이 유럽 대륙법계, 특히 독일법계의 한국 형법을 가르칠 수 있는지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가 쓴 ‘형사법의 성(性)편향’이란 책을 얼마 전 우연히 봤다. 몇 쪽을 넘기기도 전에 혼인 외(婚姻外) 성교를 독일어 ‘aussererehelicher Beischlaf’라고 쓴 표현이 눈에 띄었다. ‘ausserehelicher Beischlaf’로 써야 옳다. 그 뒤에 개정판이 나와 수정됐는지는 모르겠으나 학술서적의 실수로는 사소하다고 할 수 없다.
공지영은 386세대의 경험을 소설화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처럼 자신이 몸을 던져 체험으로 건져 올린 소설을 쓸 때 잘 쓴다. 그러나 ‘수도원 기행’ 같은 책은 ‘영성(靈性)’을 파는 상업적 의도만 보여 작가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다른 책 아무리 잘 써도 이런 책 하나가 있다는 것은 작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그의 ‘도가니’는 사실에 기반을 둔 소설인 팩션(faction)으로는 보기 드문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팩션과 팩트(fact)는 다르다. 그는 ‘도가니’의 성공 때문에 작가가 팩트를 다루는 저널리스트일 수 없음을 종종 잊는다. 그는 “일본행 비행기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 잘됐다는 아줌마들이 일등석으로 가는 걸 보고 열나고 토할 것 같았다”는 트윗을 올렸다가 한일 항공편에 일등석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지우기도 했다.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 등 일련의 저작을 통해 진보 진영 내에서 한미 FTA 동조의 기류를 반대론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넘어 자유무역 자체를 비판한다. 그의 주장인즉 ‘1970년대 한미 FTA를 했으면 삼성전자 현대차는 없었고 한국이 지금 세계 경제 10위국인데 앞으로 한미 FTA 때문에 순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장하준의 새로운 종속이론
그가 보호무역론을 옹호한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를 거론할 때면 1990년대 초 대학원 때 마르크스 가치론을 가르친 작고한 정운영 교수가 생각난다. 정 교수도 리스트를 자주 얘기했다. 그때로부터 20여 년이 지났지만 한국은 자유무역을 확대하며 계속 성장했다. 1970, 80년대는 교역을 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진다는 종속이론이 유행이었으나 슬그머니 사라졌다. 장하준의 현란한 역사적 논증에 감탄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현란함 속을 들여다보면 골자는 새로운 종속이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사람 모두 1960, 70년대 국민 대다수가 가난하던 시절 남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1980년대의 그들은 ‘마르크스와 코카콜라의 아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에 누구보다 진보 지성계의 선봉에 서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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