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권지예의 그림읽기]세상에 단 하나뿐인 선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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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2, 신철. 아트블루 제공
그리움2, 신철. 아트블루 제공
새봄입니다. 아직 꽃샘바람은 머물러 있지만, 햇살은 한결 화사하고 포근해졌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여고시절 교내 신문반에서 신문을 함께 만들던 기자 친구들과 지도교사이셨던 은사님을 만났습니다. 국어를 담당하셨던 그분은 가슴속에 오래 문학의 열정을 순수하게 간직하셨던 분입니다. 항상 선생님 스스로가 조용히 ‘문학적 삶’을 사는 분이라 느꼈기에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 바람이나 햇살이나 공기처럼 자연스레 문학적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칠순을 넘겼다고는 하나 여전히 심신이 맑고 순수한 그분을 뵈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옛이야기를 하다 보니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단발머리 문학소녀시절이 아른아른 그리움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며칠 전에 이사를 하느라 옛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여고시절에 제가 보냈던 엽서와 편지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며 조만간 따로 만나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문학소녀였던 우리는 친구들과 편지나 엽서를 참으로 많이 주고받았어요.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감성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첫사랑과 재회할 사람처럼 설레기도 합니다. 사실 얼마나 유치할까요. 하지만 얼마나 사랑스럽고 눈물겨운 내 모습이 거기에 있을까요. 그 옛날의 나를 만날 수 있게 제 편지를 보관해준 친구가 정말 고맙게 여겨졌지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편지 얘기하니까 생각이 나. 예전에 어떤 학생이 몰래 늘 내게 편지를 주었지.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위에는 항상 그 친구의 편지가 놓여있었어. 봉투도 편지지도 매번 다른 그 편지. 그 아이는 편지지에 일련번호를 매겨가며 매일 그 편지에 하루하루 자신의 이야기나 감상을 적어놓았어. 나는 그걸 소중하게 차례대로 보관했었지. 세월이 지나자 아주 묵직하게 쌓였지.”

“그 편지 아직 가지고 계세요?” “아니.”

저는 생각했어요. 그럼 그렇지. 집이 박물관이 아닌 이상 그런 걸 수십 년간 보관하는 게 보통일은 아니지.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더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졸업을 하고 한참 후에 결혼한다는 연락을 해왔어. 꼭 가보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못 가보았지. 그 후에 그 제자와 남편을 만났어.”

그런데 선생님은 그때 만나서 결혼선물로 신랑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제자가 소녀시절에 보낸 편지를 모아 예쁘게 리본으로 묶은 상자를 그녀의 남편에게 돌려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편지들에는 한 소녀의 눈과 감성을 여과한, 그녀만의 인생과 세상과 감정이 오롯이 들어 있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보게. 자네의 아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 안에 다 들어있다네.”

이 정도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장 귀중한 선물, 아니 보물 아닐까요.

집에 돌아오니 선생님으로부터 나태주 시인의 ‘선물’이란 시를 인용하며 제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에 감사하다는 e메일이 당도해 있었습니다. 이 시구가 오래 남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인 새봄의 이 지구에 함께 계시는 선생님, 당신이야말로 변함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권지예 작가
#그림읽기#권지예#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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