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에 이사 온 한국 엄마는 일본 말을 몰라 처음엔 바짝 얼었는데 몇 개월 만에 긴장감이 완전히 풀렸다. 일본 말을 몰라도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 친구를 사귀는 데도 장애가 없다. 한류(韓流) 덕분이다.
유치원생인 딸 친구 엄마들과 처음 만난 날 한 엄마는 영어로, 한 엄마는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시간이 지나자 유치원의 같은 반 일본 엄마들 모두와 친구가 됐다. 이제는 이 집, 저 집 초대받아 다니느라 바쁘다. 서툴지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의사소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요즘은 일본 엄마들이 수첩과 펜을 갖고 다니며 만날 때마다 한국어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분위기가 이러니 일본어를 배워도 쓸 기회가 있겠느냐는 게 한국 엄마의 즐거운 하소연이다.
한류 열풍은 재일교포나 새로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들의 어깨도 펴주고 있다. 일본식 이름을 쓰던 과거와 달리 한국 이름을 당당히 쓰는 사람이 늘었다. 왠지 주눅 들어 눈치를 살피며 한국말을 하던 과거와 달리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보란 듯이 떠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자신감은 드라마에서 가요로 이어진 ‘한류 문화’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일본 주류 사회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결정적 계기는 ‘한류 경제’다. 한류 문화와 한류 경제가 수레의 양 바퀴를 이뤄 한국인의 자긍심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신문과 잡지, TV에 쏟아지고 있는 한국 경제 특집은 그 생생한 사례다. 한 지상파 TV는 토요일 아침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엔터테인먼트는 한류에 밀리고 있고 TV는 삼성과 LG에 밀려 소니와 파나소닉 사장이 교체됐다. 반도체는 엘피다 파산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국은 유럽연합에 이어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효해 5년 내 대부분의 공산품과 자동차 관세가 철폐된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 이것도 저것도 (한국에) 다 질 것이다.”
일본의 한 원로 언론인은 “메이지시대 이후 한국이 경쟁상대로 이 정도까지 큰 존재가 된 적이 없다. 올해도 험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경계해왔지만 라이벌로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일본 주류의 근본적인 기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은 맥락에서 ‘왜 한국 기업은 세계시장에서 이기는가’ ‘강한 한국 경제에 배워야 한다’ 같은 종류의 책과 포럼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때 경제재정·우정민영화 담당 장관을 지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대 교수는 몇 년 전부터 “이제는 한류시스템을 배워야 한다”고 주창하고 있다. 한국의 성공방정식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이 배우려는 한국의 성공방정식은 뭘까.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세계시장을 겨냥한 국가전략이다. 내수시장이 작아 처음부터 세계시장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한국(남한 기준)에 비해 인구 2.5배, 국토면적 3.8배, 국내총생산 5배인 내수시장에 안주하다 뒤처졌다는 것이다. 15일 한미 FTA가 발효되자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기업은 핸디캡을 안고 싸우게 됐다”고 한탄했다. 아사히신문은 연일 한국과의 경쟁에서 패해 멈춰 선 공장과 사라진 일자리, 파탄 난 지역경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한때 일본의 자존심이었던 제조업 기술력도 요즘은 일본에서만 통하는 ‘우물 안 기술’로 비판받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이 배우려는 성공방정식을 한국 일부에서는 폐기처분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일본이 버리려는 퍼주기식 복지정책은 선거를 앞두고 경쟁적으로 받아들일 태세다. 이것도 하나의 한류시스템인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지나온 우리 역사가 너무도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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