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의 전권을 장악한 조조가 천하맹장 여포 사냥을 마친 뒤였다. 둘 사이에 끼여 새우등 터진 꼴이 된 유비는 조조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새장에 갇힌 새,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따로 없다고 한탄하던 유비는 황실로부터 조조를 제거하라는 밀지를 받는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 못하던 유비를 조조가 갑자기 찾는다. 잔뜩 긴장해 찾아간 유비에게 조조는 술을 대접하며 “지금 천하의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유비는 “모른다”고 잡아떼다가 조조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원술, 원소, 유장, 유표, 손견 등을 주워섬긴다. 조조는 연신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 “천하의 영웅은 당신과 나 둘뿐”이라고 일갈한다. 제 발이 저렸던 유비는 쥐고 있던 젓가락까지 떨어뜨리며 놀란다.
이를 놓고 조조의 인물 보는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들 한다.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윗사람이 부하에게 술상까지 차려주며 “네가 보기에 이 회사 최고의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속내는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의 이름부터 주워섬기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유비는 눈치 없이 계속 딴 사람들 이름만 나열하고 있으니 어찌 분통 터지지 않겠는가. 그래도 차마 “내가 최고야”라고 할 수 없으니 ‘됐다, 됐어. 천하제일 영웅은 나하고 그걸 끝까지 모른 척하는 너라고 해두자’쯤의 심정 아니었을까.
후흑학(厚黑學)을 창시한 이종오(李宗吾)는 이 장면을 또 다른 블랙코미디로 풀어낸다. 천하에 뱃속 시커멓기(黑)로는 조조 자신이 최고요, 얼굴 뻔뻔하기(厚)로는 유비가 최고라는 풀이다. 그러면서 두 사람과 정족지세(鼎足地勢)를 형성하는 손권은 “비록 조조보다 속마음이 시커멓지 못하고 유비보다 낯가죽이 두껍진 못하지만, 이 양자를 겸비했다”고 봤다.
이를 삼국지 주역에 필적할 만큼 유명한 ‘3김 정치’의 주역에게 적용해보자. 세 사람 모두 후흑을 겸비했지만 DJ가 조조에 가까운 흑파(黑派)라면, YS는 유비에 가까운 후파(厚派) 아닐까. JP는 둘을 거의 비등하게 겸비했다는 점에서 손권에 가깝지 않을까.
후흑학은 공자 이래 유교권 역사관을 지배해온 ‘춘추사관’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됐다. 춘추사관이란 역사를 항상 정파와 사파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정사(正邪)의 이분법으로 보는 세계는 흑백의 세계이고 평면의 세계다. 생동하는 리얼리티를 찾을 수 없는, 너무도 뻔한 통속극의 세계다.
우리의 정치가 그러하다. 세상은 우리가 속한 정파와 저들이 속한 사파로만 구성돼 있다. 그래서 우리의 승리는 역사의 필연이고 저들의 패배는 사필귀정이다. 우리 측의 잘못은 그 진정성까지 의심해선 안 되지만 저들의 잘못은 천인공노할 죄악이다.
워, 워, 워…. 차분해지자. 우리 정치를 그런 천박한 이분법에서 구원하기 위해 잠시 후흑학의 돋보기를 빌려보자.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형이상학적 명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음흉함(黑)과 뻔뻔함(厚)이란 형이하학적 행동의 이분법으로 정치권을 들여다보자.
꾀보 조조로 대표되는 음흉한 이들은 대개 유능하지만 독선적이고, 울보 유비로 대표되는 뻔뻔한 이들은 도량은 큰데 허술한 구석이 많다. 전자는 재승박덕(才勝薄德)이란 소리를 많이 듣고, 후자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이란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 대신 전자는 눈과 손이 빠르고 후자는 귀와 심장이 크다. 음흉함과 뻔뻔함, 당신은 이번 선거에서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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