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군인은 닥치고 터프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30일 03시 00분


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군의 사격표지판은 ‘미제 침략군, 일본 자위대, 남조선 괴뢰도당’ 순서로 돼 있었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그러던 것이 이후엔 미군의 모습만 과녁에 그려졌다. ‘남조선군은 미제의 하수인이지만 동족이니 봐주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군을 적으로 봐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한단다. 장교 출신 탈북자가 소개하는 북한군의 정치학습은 이런 식이다.

▽정치지도원=전쟁 때 남조선군을 적으로 봐야 하는가.

▽병사=분명히 적입니다.

▽지도원=남조선군의 하층 장교나 대다수 사병은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의 자식들이다.

▽병사=그러면 그들이 우리 편이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넘어오면 포섭하고 저항하면 죽이겠습니다.

▽지도원=틀렸다. 남조선군은 철저히 우리의 적이다. 망설이면 그 순간 그는 너를 쏠 것이다. 그러니 동요 없이 죽여야 한다.(이정연의 책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에서)

한국군의 대적관 교육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국방부가 ‘국방백서’를 발행할 때마다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문제를 놓고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지지만, 전투현장에서 맞닥뜨린 현실의 적 앞에서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고민할 병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최근 인천의 한 군부대 내무반에 붙은 대적관 구호(때려잡자! 김정일, 쳐!! 죽이자! 김정은)가 북한의 시비 대상이 됐다. 북한은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며 대규모 군중대회를 열어 맹비난을 퍼부었다. “천추에 용납 못할 대역죄” “천하무도한 망탕짓”이라며 “천백 배 보복의 불세례 징벌”을 위협하는 북한의 선전선동 레토릭은 가히 현란하기까지 하다.

북한은 이런 ‘폭로’도 했다. “지난해 6월 급해맞은(다급한) 역적패당은 괴뢰통일부를 내세워 전방지역 개별적 지휘관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해당 부대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사죄편지를 국방위원회 앞으로 보내온 바 있다.”

지난해 6월이라면 김씨 일가의 사진이 담긴 사격표적지 논란이 불거진 데 이어 전방 부대 안팎에 적힌 구호들(북괴군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을 북한이 문제 삼은 직후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 북측에 과잉 반응해선 안 된다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그 후 해당 부대 담벼락의 구호는 사라지고 대신 풍경화가 그려졌다.

군 당국은 이번에 문제가 된 구호에 대해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도 “내가 떼라 마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 군 내부에서 끓어오른 분노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며, 북한의 대남 비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선의를 베풀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대응이 병영국가인 북한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런 구호는 한적한 시골동네 담벼락의 벗겨진 페인트 자국 속에서나 엿볼 수 있는 그때 그 시절의 유산 아닌가. 이런 퇴행적인 모습에 예비역 장성들도 우려를 표시한다. “군의 충정을 이해해줘야 한다. 헌데 군이 유치하다는 소리를 들어선 안 되는데…”라고.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거친 구호에 담긴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회장에게 “북한 김정은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는 한 해군 대령의 막말 사건도 이런 거친 감정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흔히 ‘군인은 좀 터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터프함은 전투 현장에서 보여야 할 미덕이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군인#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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