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총선 직전 나꼼수 멤버가 서울시청 앞에서 벌인 ‘조(남성 성기를 뜻하는 단어에서 받침 ㅈ을 뺀 것) 퍼포먼스’와 낸시랭이라는 여성 행위예술가의 도심 비키니 투표 독려 행위는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벌어진 퍼포먼스이지만 암수나사처럼 하나로 결합되는 장면이다. 남성 관음증 부추기는 나꼼수
나꼼수가 허위사실 유포죄로 감방에 간 정봉주를 위해 지지자 여성들에게 비키니 사진 응원을 촉구한 일이 없었다면 그 두 장면을 하나로 엮는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은 불가능했다. 외신에서 간혹 보는 모피 반대 누드 시위야 벗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투표 독려에 왜 비키니인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키니를 입고, ‘앙’이라고 쓴 깜찍한 팻말을 들고, 다른 일도 아니고 투표를 독려하는 정치시민 낸시랭을 봤을 때 성욕 불만족의 정봉주가 원했던 것이 저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인기를 보면 나꼼수는 정치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꽃미남’ 얼굴과 식스팩 복근을 한 자기만족적인 나르시시스트 케이팝 아이돌과는 달리 나꼼수는 전통적인 마초들이다. 이 마초들은 비키니를 원한다. 또 다른 정치 스타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처럼 앵그리버드로 돼지 인형을 때리는 놀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부류다.
언젠가 영화 잡지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1960, 70년대 포르노 영화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분석한 글로, 포르노가 성(性) 해방의 결과로 태어났지만 주로 남성을 관객으로 상정해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여성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포르노는 거의 없고 남성의 관음증(觀淫症)을 충족시키는 포르노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나꼼수의 ‘정봉주 비키니 응원’ 촉구에 부응해 옷을 벗는 여성들은 물론 스스로의 결정으로 벗는 것이다. 그런 자발적인 노출은 성 해방의 이벤트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르노에서처럼 남성의 관음증만 충족하는 반(反)페미니즘이 구조화돼 있다.
성에 관한 한 모든 남녀는 어느 한편의 당사자다. 나 역시 한 남성이라 중립적일 수 없다. 묘한 것은 여성단체와 나꼼수에 환호했던 여성들의 반응이다. 강용석 의원의 여성 아나운서 비하 발언에 격렬하게 반응했던 이들이 ‘정봉주를 위한 비키니’에 대해서는 잠시 들고일어나는가 했더니 흉내만 내고 흐지부지 주저앉고 말았다.
경쟁하듯 벗기기에 열중하는 사회에서 그 정도는 재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마초가 가학성을 띠면 폭력이 되고 더 이상 재미로 봐줄 수 없다. 김용민이 쏟아낸 외설 막말을 여기서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 자체가 기분 나빠 그만두겠다. 그가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고 안수기도를 받는 장면 앞에서는 외설과 경건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이중성에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나꼼수에 약한 여성단체와 정치인
여성단체의 반응은 김용민에 대해서도 미지근했다. 여성단체연합 등이 비판 성명을 내긴 했지만 분노로 끓어올랐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한국에서 여성운동은 정치적 당파성(黨派性)과 성적 당파성이 충돌할 때 대부분 정치적 당파성을 앞세워 왔다. 그것이 정치적 진보파의 숨겨진 성적 파시즘에 관대한 여성운동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한국 여성운동의 선두세대에 김용민을 서울 노원갑 후보로 결정한 한명숙 민주통합당 전 대표가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나꼼수를 선거 운동에 모시기 바빴다. 대권 후보로 꼽히는 문재인 후보는 김용민 외설 논란이 한창인 유세 막판에 나꼼수를 부산에 초빙했다. 이해찬 고문은 김용민의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가 김용민과 나꼼수가 강공으로 나오자 자신의 주장을 부인했다. 해괴한 일탈을 꾸짖기는커녕 그 비정상적 인기에 빌붙어 보려고 필사적이었던 정치인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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