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58)가 2월 펴낸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는 책을 보고 그를 만나고 싶었다. 책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론은 명분이 없다’ ‘성장 없는 복지담론은 공허하다’는 진보좌파 진영을 향한 쓴소리도 담겼다. 인터뷰를 청했으나 “총선 끝나고”라는 답이 왔다. 총선이 끝난 직후 다시 연락했다. 12일 일단 ‘차나 한잔 하자’는 그를 만나 설득했다. 정식 인터뷰는 이틀 뒤인 토요일(14일) 오전 이뤄졌다.
―책까지 내놓았는데 너무 눈치 보는 것 아닌가.
“인터뷰 한 번 하면 괴롭다. 사나운 (말이 담긴) e메일도 오고. ‘당신이 뭔데 이명박 정권한테 면죄부를 주느냐’는 항의도 있다. 제발 나서지 말라는 호소 e메일도 있다.”
―다 아는 사람들인가.
“e메일은 주로 모르는 사람들이고. 총선 전에는 아는 사람을 통해 ‘좀 자제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주춤해지고 신중해진다. (물러서는 처신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이런 세상에 산다는 게 슬프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상대를 공격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네거티브(negative) 정치로는 한계가 있다. ‘모이자 싸우자 이기자’ 이런 정신으로는 이겨도 의미가 없다.”
―이기면 좋은 거지, 의미가 없다니?
“지금 정치는 한마디로 ‘분노의 정치’다. 여(與)든 야(野)든 어떻게든 상대를 흠집 내서 이기려는 정치는 과거 지향적 정치다. 미래 담론은 없다. 이런 분위기라면 대선도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어차피 누가 되든 세상은 시끄러울 것이고, 국민은 짜증만 날 것이다. 특히 (내가) 민주당을 더 걱정하는 것은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에서 구체적 사안에 대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거다. 당은 정책정당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원칙과 신뢰의 정치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FTA 폐기를 정책으로 내세울 거면 평소에 이런 소신을 가졌던 사람들이 리더십을 발휘해야지, 그걸 추진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니 국민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그 사람을 일종의 문화 게릴라로 본다. 제 나름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욕이나 막말이란 게 울분이나 분노를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정화) 효과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게릴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들이다. 대안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사람들까지 모두 국회의원 시켜야 하나. 당사자들은 왜 또 굳이 하려고 하나.”
―그래도 이번 선거에서 친노(親盧) 의원이 대거 입성했다.
“‘친노’라는 틀이 무슨 의미가 있나?”
―친노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건가.
“나는 그런 틀이 싫다. ‘친노’ 이전에 개인 김병준이다. 게다가 FTA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어떻게 한꺼번에 ‘친노’로 묶이나. 굳이 ‘친노’라고 한다면 ‘노무현의 가치를 얼마나 공유하느냐’로 따져야 한다. 노 대통령이 그 숱한 반대를 물리치고 FTA를 왜 했는지도 모르면서 ‘노 대통령이 실수했다’ 소리를 하는 사람을 어떻게 친노로 묶나. 묶어서 또 어쩌자는 건가.”
―똑같은 대통령 밑에서 함께 일해 놓고 이제 와 제각각 말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가치 공유가 제대로 안 됐다는 이야기 아닌가.
“FTA 반대론자는 청와대 안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참여정부)는 대통령이라는 조정권자가 있어 다들 큰 틀에서 용납하고 수용했다. 지금은 조정권자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각자 자기 생각을 내놓고 있다…. 뭐, 좋다. 하지만 좀 더 솔직했으면 좋겠다. ‘노 대통령이 틀렸다’거나 ‘노 대통령이 잘못 생각했다’ 하지 말고, ‘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거나 ‘그때는 대통령 뜻이라 할 수 없이 따랐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솔직한 거 아닌가.”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어떻게 보나.
“내 소관이 아니어서 조심스럽지만 당시 노 대통령이 구상했던 해군기지에 대한 생각들은 청일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상상력, 동북아에서의 한국의 역할, 그리고 대양해군으로서의 한국 해군의 역할까지 굉장히 큰 틀이었다. 지금 그런 고민과 생각은 다 사라졌다. 여야 모두 마찬가지다. 당시 결정을 내렸던 대통령의 고민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노 대통령’을 들먹이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거기다 사과까지 하다니…. 사과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시종일관 부드러웠던 그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곧이어 한숨 섞인 토로가 이어졌다.
“지금 민주당엔 나 같은 사람조차 설 자리가 없다. 내 생각을 포기해야 설 자리가 생긴다. 이 말은 결국 노 대통령조차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날보고 왜 지금 민주당이나 진보개혁 세력과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 묻는데 나야말로 변한 게 없다. 노 대통령과 고민했던 정책들을 ‘무식하다’ 할 정도로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변했다면 그들이 변한 거다.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을 공격했던 ‘좌파논리’를 따라간 거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면서 노 대통령이 추구했던 정책과 빗나간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계승을 말할 수 있나.”
―이번 선거에서 일부 친노 정치인들이 세종시를 자기 작품이라고 하던데….
“세종시는 노 대통령의 평생 주장이었다. 1990년대 초 노 대통령과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을 막으려면 기업은 강제로 할 수 없으니 결국 행정수도가 이전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 후보가 된 뒤 첫 정책회의에서 꺼낸 이슈도 바로 수도 이전이었다. 그때 다들 ‘(충청)표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표 생각하면 오히려 못 했다. 서울 표를 다 잃는 거 아닌가.”
선거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가 보는 대선이 궁금해졌다.
―현재 제일 유력한 야권주자를 누구로 보나.
“…글쎄, 문재인, 김두관 정도 되지 않겠는가.”
―문재인 의원 당선자에 대해 조언한다면….
“조금 더 개방적이면 좋겠다. 본인은 열려 있어도 대선 캠프를 운영하고 대선을 치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세상과 미래를 향해 더 열려야 한다.”
―김 경남도지사는?
“대단히 포용적이고 열린 사람이다. 그런데 도지사로 임기를 마치겠다고 공약했는데 지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명분에 걸려 있다. 정치에서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가.”
―안철수 원장은?
“지금까지 행보로 보면 대선을 치를 정도의 리더십을 가졌는지 의문이다. 더 분명해야 한다.”
―(안 원장은) 남이 태워주는 꽃가마를 타고 싶은 심정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밥상 차려다 주는 그런 것은 없다. 추구하는 가치나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되면 되고, 안 되면 마는 거지, 꼭 대통령이 되어야 애국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은 하늘이 주는 건데…. 하지만 만약 직접 나서지 않고 누굴 도와주면 엄청난 큰 힘이 되겠지.”
―누굴 도와줄 것이라고 보나.
그는 즉답을 피했다. 그 대신 뜬금없이 생전 노 대통령의 지도자론을 꺼냈다.
“노 대통령이 ‘지사(志士)는 옳아야 하고 장수(將帥)는 이겨야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지도자는 옳으면서 이겨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안 원장은 지사 기질이 강하다. 김 지사는 장수 기질이 강하다. 문 의원은 지사 기질이 더 강해 보인다. 대선은 장난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권력 의지가 엄청나야 한다.”
―박근혜 위원장은?
“장수 기질이 강하다. 지사는 잘 모르겠고….”
그는 인터뷰에서 “지금 상태라면 현실 정치에 대해 미래가 없는 것 같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들은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같은 대의정치 구도하에서 그게 가능할지 회의적이다. 국회라는 절차를 거치기엔 사회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의제가 너무 다양해졌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정치 불신이 높아지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본다.”
―그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답인가.
“SNS는 즉흥적 감상적이다. 싱크탱크도 많고 학계의 고민도 깊은 사회라면 모를까, 우리처럼 담론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SNS는 정치를 왜곡할 우려가 크다. 정치인들로 하여금 포퓰리즘이라는 ‘쉬운 정치’ 유혹에 빠지게 한다.”
미래 비전은커녕 ‘막말’과 ‘비난’이 판을 쳤던 이번 총선을 보며 여당 지지자든, 야당 지지자든 한국 정치에 환멸을 느낀 사람이 비단 기자나 김 교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한국 정치가 나꼼수식 막말이 지배하며 폴리페서(polifessor·정치교수) 폴리테이너(politainer·정치연예인)들만 설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기자는 요즘 야당과 진보진영으로부터 ‘이적(利敵)’ 소리까지 듣는다는 김 교수의 진심과 용기에 공감이 갔다. 남들이 뭐라 하든 소신 있게 말하는 지식인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 김병준 교수는 ::
1993년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시절 부산에서 낙선하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 정치인 노무현과 만나면서 그의 동반자가 됐다. 2002년 대선 때 정책자문단장,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혁신 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 청와대 정책실장,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5년 내내 참여정부 정책을 총괄 지휘했다. 현재 사단법인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장, 공공경영연구원 이사장을 하며 우리 사회의 진지한 미래담론을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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