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아내가 생일선물로 사준 손목시계가 있었다. 비싸진 않아도 스위스 유명 브랜드 시계였다. 결혼할 때 예물로 금반지만 교환한 터라 나름 예물시계라 여겼다. 7년간 시곗줄을 세 번이나 갈고 배터리도 두 번이나 갈면서 늘 차고 다녔다. 몇 달 전 시계가 다시 멈췄다. 대리점을 찾아갔더니 이미 오래전에 단종된 제품이라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종업원이 말했다. “5년 넘게 차셨으면 오래 차신 건데 새 걸로 하나 구입하시죠.”
아내가 사 준 시계이고 오랜 세월 정이 들었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라니. 유명 브랜드 전문 시계수리점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이건 아예 수리가 불가능한 제품입니다. 제조사가 아니면 못 고칩니다. 그냥 버리세요”란 말이 돌아왔다.
얼마 후 이번엔 처가에서 일가 식구에게 일괄 선물로 나눠준 미국산 괘종시계가 멈췄다. 역시 7, 8년 됐을까. 대리점을 찾아가니 “단종된 제품이라 부품을 구할 수 없어 한국산 부품으로 대체해야 한다”며 10만 원 가까운 수리비를 청구했다. “무슨 괘종시계가 10년도 안돼 고장 나느냐”는 타박에 “그러게요. 저희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었다. 자고로 시계라 하면 정확함과 더불어 내구성이 생명 아니었던가. 이 첨단기술의 시대에 시계의 수명이 어찌 이리 짧을 수 있단 말인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아메리칸 환갑’을 보다가 해답을 찾았다. 주인공 전민석(장두이)은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아내와 2남 1녀를 남겨두고 홀로 한국으로 와버린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다. 환갑잔치를 위해 15년 만에 가족에게 돌아온 그는 한국행을 택하기 직전 정리해고 당했던 사연을 설명하면서 ‘폐처리 전략’을 소개한다.
“제조업자들한테는 익숙한 용언데, 전자제품 같은 게 어느 날 갑자기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기술이야…전략적으로 제품 수명을 짧게 해서 지속적으로 물건을 파는 거야…미국에서 내 삶이 바로 전략적 폐처리 과정이었어.”
아 그런 거였구나. 새로운 제품을 팔기 위해 일부러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시한폭탄’을 장착한 거였구나. 그래서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쓰레기로 갖다 버리게 만들고 있는 거였구나.
동아일보 문화면에 연재 중인 ‘물성예찬(物性禮讚)’에 소개된 민병일 씨는 뒤늦은 나이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가 ‘오래된 물건’엔 일종의 영성(靈性)이 깃든다는 것을 믿게 됐다고 했다. 주말마다 독일 전역의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서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간직한 책과 앨범, 만년필, 몽당연필, 전등, 라디오를 접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그 물건들을 벼룩시장에 내놓는 사람들은 푼돈을 벌려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을 이겨낸 물건에 얽힌 사연과 추억을 나누고 그걸 꼭 필요로 하는 제 주인을 찾아주려는 것이다. 민 씨는 “그게 진짜 문화의 소통 아니겠느냐”고 했다.
‘폐처리 전략’이란 돈의 논리에 말려드는 순간, 사물의 가치를 새로움에 두는 순간, 우리 문화의 실핏줄이 뜯겨 나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손목시계, 할머니가 평생 간직한 가락지는 결코 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우리 손주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발견할 때 맛볼 기쁨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라도 장사치들의 꼭두각시가 된 줄도 모르고 ‘신상녀’, ‘신상남’을 자처하는 일만이라도 제발 멈춰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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