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이르러서도 수줍어하는 여인이 있다. 알몸을 내보이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에도 부끄러워하는 소녀 같은 황혼기의 그녀를 보노라면 가을 국화꽃 향내 같은 것이 실려 온다. 길고 긴 풍상의 세월에서 뻔뻔스러워질 법도 하련만 보이지 않는 그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가슴 시리도록 내 마음을 씻어주는 걸까. 마음속에 있는 것을 수필로 풀어내면 좋을 것 같아서 글쓰기를 권유한 적이 있었으나, 써보면 써볼수록 부끄러워 못 쓰겠다는 말을 듣고 무턱대고 글쓰기에 덤벼든 내가 당혹스럽고 부끄럽기조차 했었다. 신비한 영혼이 감춰진 채 첫서리 내릴 때 지는 국화꽃처럼 그렇게 언젠간 스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절로 슬퍼진다.
심리학자들은 자의식이 강하거나 자기도취적 우월감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대인관계에서 수줍어하며 부끄러움을 탄다고 하지만, 이 여인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를테면 천사와 대화할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는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낯설 수밖에 없을 터이니 말이다. 주변에서 나이 들었는데도 “어린애 같다”든지 “소녀 같다”는 말을 듣는 걸 보고 그녀를 천사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특히 장성한 아들이 “엄만 애 같아서 말이 안 통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그렇게 단정 지었다. 천상의 천사는 이승에서 고운 아이의 모습으로 환생한다고 하지 않던가.
세상에 알려진 학 같은 시인 중에서도 남성이지만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쓸수록 시는 어렵고, 쓰고 나면 부끄럽다”고 토로하는 어떤 시인의 고백이 기억에 남아있다. 단순한 겉치레식 겸양이 아니라 진리와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목마른 영혼의 울림으로 들린다. 부끄러움이란 ‘자신의 약점 혹은 결점이 드러나거나 밝혀졌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정의한 사전적 의미는 수줍음 타는 시인과 학자와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겐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윤동주가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표현한 대목에 젊은 시절 전율 같은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불의로 가득 찬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내 자화상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은 뉘우침이 없어 타인을 해칠 수도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서로 신세지면서 살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이기적이어서 부끄러움을 외면하는 까닭이다. 남의 마음을 배려하는 사람일수록 수줍어하고 온화하다. 이웃에 사는 백발이 성성한 은퇴한 언어학자는 한없이 겸손하며 수심의 그늘이 없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군 복무 중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당신의 맘이 아파질까 봐…”라고 말했다. 남의 슬픔은 가당치도 않을 터인데, 남을 배려해서 당신의 크나큰 슬픔을 속으로 삼키는 그 마음이 너무 아파 눈물이 솟았다.
부를 축적해 성공한 사람 중에는 종종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 그 당당함에서는 승리감이 배어나와 부럽기도 하지만 공허함 또한 떨쳐낼 수 없다. 물질적 풍요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행여 위선과 뻔뻔스러움이 맑은 영혼을 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걱정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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