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경북 경주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고도(古都)의 봄이 너무 찬연하여 그만 며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문호수 위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벚꽃이 절정으로 핀 것보다는 꽃잎이 바람에 살짝 날리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날 그곳은 정말 ‘딱!’이었어요. 바람에 벚꽃 잎이 하얀 눈발처럼 날릴 때 저는 모자가 날아간 것도 잊은 채 잠시 숨을 멈추었어요. 그 꽃잎들이 호수 위로 점점이 낙화하는 모습이 눈물나게 아름다워서요. 꽃 중에 벚꽃만큼 낙화하는 자태가 아름다운 꽃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하얀 비늘처럼 길 위에, 물 위에 잔뜩 떠있는 꽃잎들은 왠지 처연하더군요.
남쪽에서 봄날을 만끽하고 돌아와 뉴스를 접하니 하루 간격으로 연이어 아이들이 투신했군요. 만 열세 살의 꽃봉오리 같은 그 애들이 만개해 보지도 못하고 낙화하다니…. 소년은 친구의 끝없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소녀는 학업 스트레스의 중압감 때문에 유서를 써놓고 뛰어내렸군요. 특히나 소녀는 자살 매뉴얼을 써놓고 그대로 실천했다고 합니다. 시험 공부한 것을 정리하는 습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노트에 그것을 정리해놓은 소녀의 필체와 내용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졌어요. 더군다나 소년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한 목격자의 기사를 보고는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결심했던 소년이 마지막 순간 마음을 돌려 20층 창틀에 매달려 “저기요, 저기요” 하다가 힘이 빠져 결국 추락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며칠 전 동아일보에 실렸던 소년의 형이 독백체로 쓴 자책과 후회의 편지를 보다 저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미안하다’란 말이 16번이나 들어간 부치지 못할 짧은 편지. 저 또한 그런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자식 낳아 기른 어미의 심정으로 너무도 가슴이 먹먹하고 절절해서였습니다. 저도 10대 때 바로 밑의 여동생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 동생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애를 잃을 준비를 차마 못하고 그 애의 죽음을 겪게 된 제가 매일 밤 일기에 적던 그 말과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었지요. ‘얼마나 무서웠니.’ ‘미안해 미안해….’ 저는 오랫동안 마음을 앓았고, 평생 자식을 가슴에 묻은 제 어머니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하물며 멀쩡한 얼굴로 학교를 간다고 나갔던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분들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그분들의 인생에 봄은 이제 얼마나 끔찍한 계절일까요.
봄은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계절입니다. 그 합창의 하모니에 저절로 행복해지는 계절입니다. 화가의 ‘생명의 노래’ 시리즈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골의 자연 속에서 풋풋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유년의 색채가 살아있는 그림을 그린 그분은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지요.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근처 어딘가에 누워 잠을 잤던 기억이 짙게 남아있습니다. 그 흙의 원초적인 느낌들, 포근한 엄마 품 같은 숨소리, 땅에서 느낀 부성의 느낌들을 가만히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러며 13세 이전의 체험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누가 만 13세의 아이들을 아파트의 15층으로, 20층으로 내몰아 생의 벼랑 끝에 서게 했을까요. 세상은 온통 미친 듯 한꺼번에 피는 봄꽃으로 어지러운데, 정작 사람의 꽃인 이 봄꽃들은 왜 스스로 낙화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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