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상근]왜 영어판에만 각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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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6일 03시 00분


송상근 교육복지부 차장
송상근 교육복지부 차장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기자는 내용 못지않게 형식에 주목했다. 인터뷰에 응한 인물의 명단, 글과 사진의 출처, 색인이 전체 630쪽 분량에서 56쪽을 차지한다.

저자인 월터 아이작슨은 누구의 말을 들었고, 어느 자료를 활용했고, 사진은 어디서 구했는지를 밝혔다. 예를 들어 1장에는 잡스의 입양과정이 나오는데, 아이작슨은 이 부분과 관련해 자신이 만났던 7명의 이름, 참고했던 8가지 자료(책 신문 잡지)의 연도와 페이지를 명시했다.

일본 게이오대의 후나바시 요이치 교수는 ‘김정일 최후의 도박’이라는 책을 한미일 3국에서 출간했다. 아사히신문의 칼럼니스트로 일하던 2007년이었다. 저자는 한국어판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각주와 인용을 넣었어야 하지만 지면 관계로 할애할 수 없었다…영어판에는 각주·인용을 게재하도록 돼 있다.”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에는 인터뷰 대상자의 명단만 나온다. 각주 및 인용 표기를 지면 관계로 뺀다는 설명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저자의 독자적 생각이나 취재만으로 200자 원고지 3000장 분량의 논픽션을 쓰기 어려우니 출처를 표기하도록 편집자가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일본에 비해 미국의 글쓰기(또는 출판) 윤리가 엄격함을 보여준다.

신문은 어떨까.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부고 기사를 보자. 그녀는 작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뉴욕타임스는 이 소식을 다음 날 A1면 톱으로, 상보를 A28면과 29면에 실었다. 기사는 멜 거소(Mel Gussow)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상보 한 곳에 다음과 같은 편집자의 말이 나온다.

‘멜 거소가 이 기사의 원작성자인데 2005년 숨졌다. 윌리엄 맥도널드, 윌리엄 그라임스, 대니얼 슬롯닉이 기사를 보완하는 데 참여했다.’

유명인의 건강이 좋지 않으면 국내외 언론은 기사를 준비한다. 마감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가 숨지면 충실하게 만들기가 어려우니까 생전 일화와 평가를 중심으로 미리 써놓는다. 실제 사망 사실이 확인되면 내용을 보완해서 지면에 내보낸다. 뉴욕타임스와 국내 언론의 제작관행은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기사를 미리 썼던 기자가 회사를 그만두거나 다른 부서로 옮기고 나서 유명인이 숨지면 어떨까. 뉴욕타임스와 국내 언론의 제작관행은 여기서부터 다르다. 뉴욕타임스는 최초 작성자의 이름을 1면에 붙였다. 국내 언론은 준비했던 내용을 참고하겠지만 회사를 떠난 기자의 이름까지 넣지는 않을 것 같다.

정치권에서 잇따라 나오는 표절 의혹을 보면서 미국의 언론학 교과서 하나를 다시 읽었다. 미주리대 교수 4명이 공동 집필한 ‘뉴스취재와 보도’다. 표절을 주의하라면서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보도자료의 경우 직접 인용을 제외하고는 기자가 문장을 다시 쓰거나 (원문을) 최소한도로 사용하라”고 설명한다.

국내에서는 정부 대학 기업이 제공한 자료를 통째로 옮긴 듯한 기사가 적지 않다. 본문에는 ‘…에 따르면’이라는 단어, 도표와 사진에는 ‘…제공’이라는 단어를 넣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다. 미국에서는 이런 부분까지 표절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어느 쪽이 잘하는 걸까.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다.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한 문장과 한 장면이라도 스스로 만드는 노력, 그리고 남의 아이디어를 활용할 때는 출처를 밝히는 자세. 기사 논문 영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노력과 자세가 부족하다면 제2, 제3의 표절 논란이 각계에서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송상근 교육복지부 차장 songmoon@donga.com
#광화문에서#송상근#표절#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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