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제인 하먼 美우드로윌슨센터 원장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26일 03시 00분


“SNS 보급 속도 감안하면 北 정보차단 시간 얼마 안남았다”

제인 하먼 우드로윌슨센터 원장은 60대 후반의 나이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큰 몸동작을 섞어가며 한미관계, 북한의도발과 체제의 미래 등에 대해 식견을 밝혔다. 그는 미국 최고의 외교안보분야 전문연구기관을 이끌기 위해 9선 의원 자리를 버렸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제인 하먼 우드로윌슨센터 원장은 60대 후반의 나이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큰 몸동작을 섞어가며 한미관계, 북한의도발과 체제의 미래 등에 대해 식견을 밝혔다. 그는 미국 최고의 외교안보분야 전문연구기관을 이끌기 위해 9선 의원 자리를 버렸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제인 하먼 우드로윌슨센터 원장(67)은 햇빛 속에서 금방 나온 듯 흰색 민소매 원피스 차림을 한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걸’이었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하원의원 9선(選)을 한 그는 18년 동안 외교안보 상임위원회인 국방위, 정보위, 국토안보위에서만 활동했다.

2006년부터 윌슨센터와 손잡고 북한 국제문제 조사사업(NKIDP)을 벌이고 있는 경남대와 한국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방한한 하먼 원장을 24일 서울시청 부근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우드로윌슨센터는 1968년 미국 의회 후원으로 창립된 외교안보 분야 전문 연구기관이다. 브루킹스연구소가 진보, 헤리티지재단이 보수 성향을 대변하는 반면 윌슨센터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초당적 합의 도출을 위한 중도의 길을 걷고 있다.

하먼 원장은 2박 3일의 짧은 일정을 분 단위로 쪼개 쓰며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김황식 국무총리,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등 정부 고위당국자는 물론이고 김우상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김병국 국립외교원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만났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은 하먼 원장에게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면담을 마친 뒤 여의도에서 시청 앞까지 교통 체증을 뚫고 왔지만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뒤에는 곧바로 주한 미국대사관이 마련한 한국 여성전문가 7인과 만났다.

―박 위원장과의 면담은 어땠나.

“45분간의 훌륭한 만남이었다. 따뜻하고 대단히 명석하다(bright)는 느낌이었다. 개인적 면담이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지만 외교안보 현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대단히 차분한 태도 속에서도 뭔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힘을 느꼈다. 소란스러움과는 대조되는 어떤 것이었고 상당히 참신하게 느껴졌다.”

―12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유력 후보란 점을 의식했나.

“윌슨센터는 특정 정파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4·11총선 승리를 축하한다고 했다. 유력 대권주자로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덕담도 했다. 박 위원장은 대통령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2008년 민주당 경선은 명승부였다.

“오바마의 선거운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특별한 것이었다. 오바마가 선거운동 기간에 미국 대중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변화와 개혁의 메시지였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위해 오바마에게 투자했다. 클린턴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오바마의 시대정신을 이기기 어려웠다. 그래도 클린턴은 여전히 대통령의 자격을 갖췄고 2016년 대통령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먼 원장은 김황식 국무총리를 만나 존 쿠퍼의 ‘우드로 윌슨: 전기’라는 책을 선물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 원칙을 천명한 윌슨 대통령에 대한 최신 전기다. 하먼 원장은 “불행히도 윌슨의 영감은 당장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를 끝장내지 못했고 그로부터 2, 3세대가 지난 후에야 한반도 남쪽에서만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 모두 대선을 치르게 되는데 향후 한미관계에 변화가 생길까.

“현재 한미관계는 역대 최상의 관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상황이 좀 달라지겠지만…(웃음). 물론 위협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는 북한이 한미 양국의 최고 정치이벤트를 앞두고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만약 북한이 ‘내폭(implosion)’한다면 그 영향은 심대할 것이다. 북한의 난민이나 탈북자 문제, 대량살상무기의 통제 등 끝도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 나라로 다시 통일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윌슨센터의 원장 자리는 2010년 여름 리 해밀턴 원장이 은퇴하면서 공석이 됐다. 그해 9월부터 후임 원장 인선을 위한 위원회를 꾸리고 적임자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물망에 올랐고, 실제로 면접을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먼 원장은 “당시 인터뷰한 후보자들을 잘 안다. 나라면 즉각 원장으로 임명했을 분들이었다”면서도 당시 후보자 이름은 철저히 함구했다.

2010년 말 치러진 하원선거에서 하먼 의원은 9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윌슨센터의 원장직 제안을 받고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임기가 시작된 지 한 달 만이었다.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윌슨센터의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150여 명의 세계 최정상급 연구진을 갖추고 있고 22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현실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두뇌집단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윌슨센터가 브루킹스연구소, 헤리티지재단과 차별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냉전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위해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자료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달랐다. 동독, 루마니아, 체코 등 평양에 상주 공관을 둔 나라의 외교문서를 발굴해 현재 북한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중요한 역사적 창구를 발견하는 일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원장으로서 목표는 무엇인가.

“한국-미국-중국 간 3자 대화를 현재 추진하고 있다. 양자대화는 흔히 이뤄지고 있지만 동아시아 지역의 역동성이나 현재 정세의 변화를 고려하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키신저가 운영하는 중국 프로그램이 있고 아시아 프로그램, 한국 프로그램도 있으니 이들 프로그램을 적절한 방식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생각이다.”

그는 중국의 부상(浮上)에 대해 “그 자체로는 환영할 만한 일이고 중국과 문화, 경제, 사회적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면서도 “다만 중국 지도부는 지금과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하먼 원장은 하원의원 시절인 1997년 동료 의원들과 방북했다. 하먼 원장은 “북한으로서는 극심한 기근으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힘든 시기였다”며 “전체 느낌을 말한다면 좀 기이하고, 사실 좀 무서웠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관례대로 미군 군용기를 타고 평양에 갔지만 공교롭게 창문도 없고 다른 비행기에서 급조한 의자를 붙인 흔적이 있었던 짐차 같은 비행기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평양에 내렸다. 가로등도 전깃불도 거의 없었다. 평양에 남아 있는 유일한 빛은 김일성 동상을 비추는 불빛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좀 으스스했다. 북한 사람들은 우리 비행기가 ‘스파이호’처럼 보였다고도 했다.”

―평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고위당국자를 면담한 자리에서 미사일발사 기술 확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자 그 당국자는 대뜸 ‘그 대가로 얼마를 줄 수 있는가’라고 되물어 당황했다. 양각도 호텔에 머물렀고 음식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산더미처럼 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양의 주(主)도로는 마치 비행기 활주로 같았다. 길은 널찍했는데 사람도 차도 별로 없었다. 평양은 그 전체가 하나의 군부대 같은 모습이었다.”

하먼 원장은 “북한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3대 세습과 관련해 “북한체제가 그렇게 끈질기게 권력세습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어떻게든 권력을 붙들고 유지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당국자,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공통된 생각은 김정은이 북한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라며 “최소한 현재까지는 그런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언제까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가.

“시간이 갈수록 북한처럼 폐쇄된 병영국가가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특히 정보통신의 발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광범위한 보급 속에서 북한이 언제까지 정보를 차단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아랍의 봄에서 보았듯 주민들이 자신들이 처한 불공정한 상황과 부조리를 인식하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당장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북한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명백하다.”

―북한으로서는 돌파구가 점점 줄어드는 것 아닌가.

“당장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완전한 사찰에 응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해야 한다. 그런 뒤 비핵화를 향한 진정한 의지를 보인다면 북한에도 새로운 길이 열릴 기회가 올 수 있다. 미얀마의 경우를 봐라. 북한 지도부는 미얀마 군부의 결단에 따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되어 온 북한의 핵 위기가 전혀 해소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 점에 대해 하먼 원장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이 전 세계가 요구하는 것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북한 주민과 자신들의 미래에 매우 파괴적인 길을 고집스럽게 걷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아직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비법을 찾아내지 못했고 그런 ‘마법’이 있는지 불투명하지만 한편으로는 터프하게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유연하게 북한을 다룰 수 있는 정책의 묘(妙)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프트파워 이론의 주창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가 언급한 스마트파워처럼 정책수단을 좀 복합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해결의 기미가 없다.

“예멘식 방법을 택해야 한다. 차선책이기는 하지만 러시아가 개입하도록 해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혈사태 해결책이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일부를 지역구로 삼았던 하먼 원장은 한국 및 한국인과도 꽤 인연이 있다. 하먼 원장은 “컬럼비아대 비즈니스스쿨을 졸업한 아들의 동창생이자 ‘진지한(serious)’ 여자친구가 한국인 2세”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방한 기간에 아들 여자친구의 부모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아들이 7월에 직접 서울에 와 상견례를 한 뒤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해 받아들였다”고 했다. 한반도의 평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한국을 사랑하는 하먼 원장이 한국에 다시 돌아올 아주 좋은 이유가 생긴 셈이다.

○제인 하먼 원장은

△1945년생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1993.1∼1999.1 연방하원의원 △2001.1∼2011.2 연방하원의원 △2011.2∼현재 우드로윌슨센터 원장 △국방정책자문위원, 국가정보원로자문그룹 의장 △국방부 공로훈장(1998) 국가정보분야 공로훈장(2011)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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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제인 하먼#북한#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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