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재미있는 동영상 하나를 보았어요. 너덧 살이나 되었을까요. 귀여운 사내아이가 그림책을 펴놓고 신세한탄하는 동영상입니다. 그런데 어른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이의 대사가 너무도 처절해서 오히려 웃음을 머금다가 끝내는 씁쓸해졌어요. 상 위에 그림책 같은 학습지를 펴놓고 앉은 아이가 다짜고짜 울면서 생떼를 부립니다. “내가 잘 수도 없고 공부해야 되나! 내가 잘 수도 없고….” 그런데 생떼 수준이 아니라 아이는 아예 원망 섞인 통곡을 합니다. “이게 먼일이고! 우째 이런 일이 있나!” 그때 목소리만 들리는 엄마가 독촉합니다. “빨리 세알라(세어) 봐라!” 핑퐁처럼 두 모자의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이런 일이 몇 번째고!” “다시 일부터 열까지 세알라 봐라고! 한 마리 두 마리 시작!” “내가 잠도 못 자고 이래가 살겠나!” 통곡과 절규를 섞어 반항하는 꼬마의 고집도 고집이지만 공부를 시키려는 엄마의 집요함도 참으로 막상막하입니다. “한 번만 해봐라. 시작!” “내가 진짜 이래가∼ 이래가∼ 살 수 있겠냐고오∼!” 아이가 상 위에 엎어지며 가락을 넣어 통곡을 하는 모습이 짠합니다. 그렇게 싫다는데 잠도 안 재우고 무슨 공부를 저렇게까지 시키나 싶습니다. 하지만 한국 유아교육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그 아이의 ‘절규’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 보니 제 아들의 어릴 때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이는 만 3세부터 시작되는 프랑스의 유아교육기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의 교실에는 아이들의 이름표가 붙은 뭉크의 그림이 아이들 수만큼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이들에게는 좀 안 어울린다 싶은 ‘절규’라는 그림이었지요. 보다시피 뭉크의 절규에는 공포스러운 불안감이 가득한 붉은 노을이 절규하는 인물의 배경에 불길하게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작과 다른 점은 그 노을 부분을 생각풍선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아이들의 서투른 그림이 각양각색으로 들어 있었어요. 자동차, 개, 고양이, 뱀, 아빠 얼굴, 괴물, 유령, 총…. 아이들이 명화를 보고 절규하는 인물에 감정이입하여 공포를 느낄 만한 대상을 그린 거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어요. 그게 뭉크의 그림이든, 제목이 무엇이든 아이들이 알 게 뭐겠어요. 아이들의 감성과 상상을 일깨우고 고사리손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게 한 프랑스의 예술교육에 저는 그 순간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만 다섯 살에 한국에 온 아들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보냈을 때 아이는 피아노에 대해 공포를 느꼈습니다. 한글은커녕 프랑스어 알파벳조차도 깨치지 못한 아이에게 선생님은 한 달 동안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게 하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매일 열 번씩 쓰게 했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아이가 고사리손으로 매일 글씨를 그야말로 그리다가 급기야 울면서 피아노학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지요. 그 이후 아이는 피아노는 소리조차도 듣기 싫어했습니다.
뭉크는 ‘절규’라는 그림을 몇 가지 버전으로 그렸습니다. 특히 뭉크의 ‘절규’는 패러디가 많은 그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노을 대신에 개를 그려 넣은 우리 아이의 패러디 그림은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으로 제가 소장하고 있지요.
갑자기 동영상의 아이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궁금합니다. 그림 대신에 절규하는 인물의 머리 위에 이런 말풍선이 떠 있지 않을까요? “아악! 내가 이래가 이래가는 못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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