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날씨는 여름을 스크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연일 최고기온은 20도를 상회하고,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도 있다. 사람들이 옷 입기에 가장 곤란함을 느낀다는 온도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침마다 입을 옷이 없어서 고민하고(옷장은 이미 넘쳐나는데도!), 계절마다 한 번씩 옷만 훔쳐가는 도둑이 드는 것 같다고 푸념했겠지.
야근과 출장을 밥 먹듯이 치러야 하는 직장에서 오래 버텼다 싶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몸에 이상이 찾아왔다. 건강보다 중한 것은 없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지만 나는 월급 생활자로서의 소속감과 보상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어쩌면 그간의 경험으로 시간과 건강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체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휴가 아닌 휴가를 얻어 나를 타일러 보았지만 그때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품목을 소비함으로써 활기를 유지하는 도시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비누 냄새를 채 없애지도 못하고 올라탄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킨십 수준으로 부대껴야 하는 출근길은 끔찍했고, 환승역에 정차하면 김빠진 맥주거품처럼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퇴근길의 사람들 속에서 나는 세상에 패퇴한 심정을 자주 맛보곤 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생활비는 어떻게 하지? 떨어질 줄 모르는 통신비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도 사야 하고, 커피는 매일 마셔야 하는데…. 무수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결심했다. 자발적인 실업자가 되기로!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쓰며 살기로!
그렇게 직장을 그만 두었다. 쉬며 놀며 시를 쓰고, 온전한 나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지 이제 두 해째가 되어간다. 일을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일주일에 사흘을 넘기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잘 지키고 있다. 벌이가 줄었으니 자연 소비도 줄었고, 외출하는 것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졌다. 무언가를 사기 전에는 갖고 싶은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도 나는 도시에 몸을, 도시가 아닌 곳에 마음을 반씩 걸치고 살아간다. 어느 쪽으로든 한곳으로 나를 모으는 상상을 해보곤 하지만 당분간 실현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따금씩 복닥거리는 지하철을 견디고, 귀농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냥 부러워하겠지. 그러나 “이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맥없는 질문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처럼 천천하고 밍밍하게 사는 일상이 좋다. 치마상추가 갓 돋아나기 시작한 스티로폼 상자를 들여다보며, 연두색과 녹색 사이에 무수한 초록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일, 지렁이를 키우기 위해 커피 찌꺼기를 모으는 재미를 알게 된 내가 대견하다(커피 찌꺼기 위에 버섯을 기르는 것에도 도전하고 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신과 의사 하워드 커틀러가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났을 때 했다는 그 질문을. “그래서, 당신은, 행복한가?” 달라이 라마는 어떤 의심도 가질 수 없는 평화로운 목소리로 행복을 전했다지만 나는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그 어느 때의 나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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