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희균]결핍의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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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4일 03시 00분


김희균 교육복지부 기자
김희균 교육복지부 기자
올해 초등학생이 된 아들과 종종 수영하러 간다는 40대 남성 A 씨. 도무지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댔다. 수영장에 갈 때마다 물안경이나 수영모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최근에는 10만 원이 넘는 새 운동화를 사물함에 넣지 않아 잃어버렸는데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다. A 씨는 “물건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부모가 더 좋은 걸 사주는 기회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히려고 독서지도사 자격증까지 딴 열혈 엄마 B 씨. 딸이 돌이 되기 전부터 권장 도서 리스트에 맞춰 한국어와 영어 책을 읽혔다. 지난해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거실과 아이방의 창문이 없는 벽면은 모두 책장으로 채웠다. 그런데 요즘 아이가 갑자기 책을 모조리 꺼내 찢어버리거나 날카로운 펜으로 짓이기는 바람에 B 씨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이런 행동이 요즘 아이 사이에는 흔하다는 게 교사들의 말이다. 서울의 A어린이집 교사는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자기 물건에 무심하다. 새 물건을 얻어도 금세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너무 풍요로운 세대, 모든 것이 과잉인 세대의 문제라고 진단한다.

주위 누구나 고만고만하게 살던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필자에게는 24색 크레파스 한 상자가 큰 보물이었다. 견출지에 이름을 꼭꼭 눌러써서 24자루에 일일이 붙이고, 행여 한 색깔이라도 없어질까 봐 수시로 정리했다. 생일이나 어린이날에 48색 크레파스나 사인펜 세트를 얻으면 큰 부자가 된 듯했다.

교실 하나를 개조해 만든 국민학교의 ‘문고실’에는 학생들이 한두 권씩 집에서 가져다 낸 단행본과, 졸업생이 기증하고 떠난 전집이 있었다. 책이 많은 집이라고 해도 전래동화 세계명작동화 백과사전 정도가 구색의 전부이던 시절, 저녁 무렵 TV에서 하는 30분짜리 만화가 유일한 볼거리였던 시절이라 문고실은 인기가 많았다. 누가 책을 읽으라고 닦달하지 않아도 문고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책장을 넘기는 친구들이 많았다.

새삼 이제 와 촌스럽게 물자절약이나 독서의 중요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학용품도 장난감도 먹을 것도 넘쳐난다. 인터넷과 게임 등 놀거리도 무궁무진하다. 집집마다 읽어야 할 책이 줄을 서 있다. 부모들은 하라는 것도 참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어쩌면 결핍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 스스로 뭔가를 갈구하고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나갈 틈이 없다. 모든 것이 이미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물건을 잃어버려도 상실감을 느끼고, 작은 것을 얻어도 기쁨을 느끼는 그런 감정은 아예 모른다. 물건이란 으레 또 생기게 마련이니까.

주위 누구나 넉넉해 보이는 시대이다 보니 남들이 가진 것, 남들이 하는 것을 자녀에게 해주지 않으면 강박증을 느끼는 부모들의 탓이 크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린이날을 겨냥한 e메일들이 잔뜩 날아들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영유아 두뇌 발달에 필수라는 80만 원짜리 교구, 최첨단 방식이라는 100만 원짜리 영어 학습기, 어린이 뷔페와 놀이기구가 갖춰졌다는 호텔 숙박 상품이 주르르 펼쳐진다.

결핍과 욕구가 결여된 오늘날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100만 원짜리 교재보다도 백지와 연필 한 자루일지 모른다. 화려한 퍼레이드와 기름진 먹거리로 가득한 놀이동산보다는 단출한 도시락과 텅 빈 풀밭일지도 모른다.

김희균 교육복지부 기자 foryou@donga.com
#결핍#강박증#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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