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김병준 전 대통령정책실장은 민주통합당 핵심당직자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당직자는 김 전 실장의 저서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를 문제 삼았다. 책에 나온 ‘성장 없는 복지 담론은 공허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론은 명분 없다’는 핵심적 메시지가 당의 정책 기조와 맞지 않아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김 전 실장은 “학자적 소신에 따라 쓴 것인데 무슨 문제냐”며 반박했다. 노무현 정권의 ‘정책 설계사’로 통했던 그가 친노(친노무현) 당권파의 화살을 맞은 것은 아이러니다.
한명숙 대표 체제를 만든 친노 당권파는 민주당을 사실상 접수했다. 2007년 대선 패배 후 스스로 ‘폐족(廢族)’이라며 고개를 숙였던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한 것이다. 이해찬과 문재인, 문성근은 당권파의 주축이다. 친노 당권파가 이끈 민주당이 총선에서 졌어도 여전히 당내 최대의 정치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그 세력에 걸맞은 정치력까지 갖췄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동안 잠복해 있던 친노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할 조짐이 보인다.
친노 당권파가 꺼내 든 ‘이해찬 당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카드는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 카드는 현실화했지만 세력과 세력의 ‘야합(野合)’보다는 추구해야 할 가치를 내걸고 도전했던 노무현식(式) 정치패턴은 빛이 바랬다. 친노 당권파의 어깨엔 힘이 상당히 들어갔고 옛날 ‘밀실정치’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박 합의’에 숟가락을 걸친 문재인은 PK 지역에서 시원찮은 성적표에다 야합 비판론까지 나오면서 지지율 정체의 늪에 빠져든 느낌이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가 공정한 경선 관리의 열쇠를 쥔 당 대표 판짜기에 개입하는 것은 불공정 행위다. 사전에 이러한 파장을 예측 못했다면 정치적 무능을 드러낸 것이다.
‘이-박 합의’를 계기로 친노 당권파의 리더십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호남지역 친노 세력은 문재인 중심의 부산파가 청와대를 장악했을 때 상당한 소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인들에게 “일반 행정관 하나 뽑으려고 해도 부산파의 견제가 심했다”고 토로했다. 호남지역 친노 원로는 문재인의 인물평을 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더는 말하기 싫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부산파 인사들은 “최대한 인사의 공정성을 기했다”고 항변하지만 호남지역 친노 인사들은 부산파의 패권주의로 보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해찬은 작년부터 문재인 대망론에 불을 지폈다. 올해 초 문재인의 지지율이 치고 올라가자 “안철수가 없어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당내에선 이해찬(60)이 한 살 차이인 문재인(59)을 대선후보로 밀어 ‘상왕(上王)정치’의 끈을 이어가려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이 낙동강 전투에서 선전하지 못하자 이해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친노에 속한 정세균 전 대표와 김두관 경남지사 측은 이해찬의 행보에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다.
야권연대의 파트너인 통합진보당에선 비례대표 부정경선 후속 조치를 놓고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정면충돌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한 당권파 소속 당원이 ‘국민의 눈높이가 아니라 당원의 눈높이가 중요하다’고 말한 대목이 눈에 띈다. 자기 세력만 믿는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민주당도 예외일 수 없다. 문재인은 23일 노 전 대통령 3주기가 끝나면 대선 출마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밝힐 예정이다. 친노 당권파에 쏠린 당 안팎의 곱지 않은 시선을 냉정히 평가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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