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산행과도 같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곁에서 북돋아줄 동반자가 필요하다. 그 동반자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이가 가장 좋지 않을까.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자신은 없으나 내 곁의 한 사람이 행복하도록 앞으로의 시간과 마음을 쓰겠다.” 남편 디디에가 했던 말이다. 남편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나를, 내가 하고 있는 ‘한국을 알리는 일’을 응원하며 지지하고 있다.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워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남편 자랑을 하게 된다.
남편과의 첫 만남은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다. 주한 프랑스 대사 부부와의 친분으로 공적 사적 모임에 자주 초대되던 때였다. 프랑스 대사관저 파티에서 대사님이 “프랑스 싱글과 한국 싱글”이라며 소개해 명함을 주고받았다. 몇 달 후 대전 엑스포 때 다시 만난 디디에가 회의 장소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로도 자주 전화하며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친한 친구가 됐다.
결혼에 대한 주위의 종용도 없었고 결혼의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디디에를 한국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으로만 생각했다. 1994년 가을 디디에가 캐나다의 호텔 총지배인으로 발령받았는데 이별의 감정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캐나다에서도 매일 전화를 했고 팩스로 편지를 주고받던 어느 날, “같이 살면 좋지 않겠느냐”는 디디에의 느닷없는 프러포즈에 1995년 5월, 서른아홉 살로 독신 탈출을 하게 됐다.
디디에가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결혼 뒤에도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던 우리는 서로에게 늘 보고 싶은, 만날 때마다 신선한 부부였다. 그 감정이 남아서인지 지금도 외출할 때면 자연스레 손을 잡고 걷는다. 내가 대표로 있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의 직원이나 제자들은 우리 부부가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마흔 전에 얻은 게 많다. 젊은 나이에 모교의 강단에 설 수 있었고 보잘것없는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인정을 받았다. 가장 자랑할 것은 1992년 프랑스 정부의 교육공로훈장을 받은 것과 디디에를 만난 것이다. 디디에에게 미안한 것도 많다. 바쁘게 생활하느라 다른 아내들처럼 섬세하게 남편을 챙겨주지 못한다. 바나나, 토마토, 당근을 한꺼번에 갈아주면 우리 아내가 해준 주스가 제일 맛있다면서 남편은 단번에 컵을 비운다. 그런 남편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집안 정리와 다림질을 도맡아 하는 호텔리어 남편의 든든한 외조가 나의 후학 양성과 한국 알리기 활동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한국을 알리고자 설립한 CICI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통역사와 교수로 학생들만 가르치던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최 교수가 총대를 메면 적극 지원해주겠다”던 고마운 분들 덕분에 덜컥 시작했지만 처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나라도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를 가치화해 알리는 일을 시작한 단계였다. 그러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리오! 다행히 세계 곳곳에서 거주해 문화 경험이 많은 남편이 행사기획이나 프로젝트를 할 때 객관적인 조언을 해줘 큰 도움이 됐다.
CICI는 매년 한국의 이미지를 알린 사람과 기관, 상징물에 이미지상을 준다. 역대 수상자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지휘자 정명훈 씨,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씨, 인천국제공항 등이 있다. 올해의 수상자는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뽀로로 아빠 최종일 씨, 이자스민 씨다. 한국에 거주하는 내·외국인 오피니언 리더들을 모시고 진행하는 시상식 행사는 수상자 선정부터 시상식 장소 예약, 음식과 공연 선정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매년 틀을 갖춰가는 행사는 남편의 공이 크다.
디디에는 지금 중국 상하이에 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남편은 늘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든든한 지원군이자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내 곁의 한 사람이 행복하도록 앞으로의 시간과 마음을 쓰겠다는 남편의 따뜻한 말은 나를 우뚝 일으켜 세운다. 든든한 남편의 지원에 힘입어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힘차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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