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의대 법대생에 내 장학금 주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12일 03시 00분


관정(冠廷)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인 이종환 삼영화학 회장(89)이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신축을 위해 600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이번 거액 기부는 한국 대학이 발전해야 해외유학에 따른 국부(國富) 유출을 줄일 수 있다는 그의 지론(持論)에 따른 것이다. 60년 넘게 기업을 경영해 모은 돈 거의 전부와 자택까지 장학기금으로 내놓은 그는 ‘빈손으로 떠난다(空手去·공수거)’는 자신과의 약속을 거듭 실천에 옮기고 있다.

관정재단은 운영자산과 장학금에서 국내 최대 규모다. 2000년 이 회장이 사재 10억 원으로 설립한 후 매년 거액을 더 내놓아 출연금이 8000억 원에 이른다. 지금까지 학생 4000여 명에게 800여억 원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이 회장은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탈 정도로 검소하지만 “인재 육성을 위한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불황과 금융위기로 기업 수익이 줄었을 때도 장학금 지급 기일은 반드시 지켰다. 환율이 치솟아도 유학생들에게는 변함없이 달러 기준으로 장학금을 보냈다.

관정재단이 장학생을 선발하는 기준과 철학은 뚜렷하다. 의대 법대생에게는 지원하지 않고 기초학문 위주로 장학금을 준다. 해외유학 장학생을 뽑을 때는 자연이공계 80%, 인문사회계 20%가 원칙이다. 과학 영재들이 의대로, 문과 수재들은 법대로 몰려가는 세태에서 출세와 안정적 직업을 목표로 삼은 학생들은 자비(自費)로 공부하면 된다는 의미다. 그 대신 꿈과 열정으로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재목으로 키우려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 철학으로 기업을 탄탄하게 키워냈다. 그만큼 국가 발전에서도 인재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듯하다.

평생 모은 350억 원대의 부동산을 KAIST에 기증하고 20평형대 실버타운에 사는 김병호 서전농원 대표 부부는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요,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말했다. 이종환 회장은 재단 홈페이지에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하지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련다”라고 써놓았다. 이 회장의 삶과 관련해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기업인들이 힘들게 번 돈의 가치를 ‘천사의 예술’로 승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 이 회장의 기부 행진은 팍팍한 세상에서 갈증을 느끼고 있는 국민에게 한 줄기 샘물이다.
#사설#장학금#이종환#관정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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