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환관과 주사파

  • Array
  • 입력 2012년 5월 15일 03시 00분


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새누리당 황우여 전 원내대표는 원래 ‘이회창 사람’이었다. 그는 이 씨가 끌어 감사위원을 지냈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부장판사이던 199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결정을 뒤집는 ‘MBC 주식 반환’ 판결을 내려 가정법원으로 좌천된 적이 있다. 그때 ‘대쪽 판사’로 알려진 이 대법관이 그를 두둔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평소 말을 가려서 하는 정치인이다. 격한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대권 도전을 선언한 이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지 않아 초조했던지 같은 당 동료 의원에게 심한 말을 했다. 정 의원은 13일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황우여 의원 등을 지칭하는 게 환관이다. 정치하는 사람이 대응을 하는 게 기본인데 언론에서 환관이라는데 대응을 안 한다. 환관이라고 쓴 사람한테 화를 못 내는 게 말이 되나”라고 말했다.

정 의원이 언급한 환관은 어느 신문의 기자가 ‘그 주변의 환관만 득세한다는 풍문’이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에서 따온 말이다. 이 기자는 박근혜 위원장의 소통 부족과 함께 박 위원장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측근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풍문’을 빌려 환관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기자는 ‘황우여’라는 이름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정 의원의 발언은 ‘언론에서 환관이라는데 왜 대응을 하지 않나’라고 따지는 식으로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지만, 사실상 황 전 원내대표를 환관으로 지칭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환관은 왕조시대 임금을 보필하는 내시를 말한다. 거세로 남성성(性)을 상실해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사내답지 못한 인물’이라는 욕으로 쓰인다. 정 의원의 환관 발언은 박 위원장 주변에서 바른 소리는 하지 않고 권력을 누리려는 측근들을 질타하는 동시에 박 위원장을 왕조시대의 ‘임금’에 빗대 비난하려는 복합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환관이라는 표현은 적절한 비유도 아니거니와 심한 인격 모독에 해당한다. 누가 정 의원과 가깝게 지내는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을 환관이라고 부른다면 그들의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다.

새누리당에서 줄곧 ‘중립’을 지켜오던 황 전 원내대표는 작년 5월 친박(친박근혜)계와 쇄신파 의원들의 도움으로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그 뒤로 ‘친박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그렇다고 골수 친박계는 아니고, 더구나 ‘환관’에 비유될 만큼 박 위원장의 지근거리에 있는 측근도 아니다. 그는 정 의원의 발언을 듣고 그냥 웃어넘겼다고 한다. 그의 한 측근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의 화합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리에 맞지 않은 발언에 대응하거나 각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주사파(主思派)가 나쁜지 환관이 나쁜지 토론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설사 박 위원장 주변에 그를 신주(神主)처럼 떠받드는 맹종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주사파와 비교하는 것은 도를 한참 넘어섰다. 주사파는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세력이다. 정 의원은 박 위원장이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존재라도 된다고 보는가.

윤여준 씨는 ‘대통령의 자격’이라는 저서에서 ‘언어구사’를 중요한 자질 중 하나로 꼽았다. “대통령은 자신의 삶 속에서 녹여낸 절제되고 기품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높은 품격과 설득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 의원의 ‘환관’ 발언은 품격이 떨어지고 설득력도 없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오늘과 내일#이진녕#주사파#황우여#정몽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