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친구 같은 나라’가 늘고 있다. 지난해 이 대열에 합류한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에티오피아다. 자원도 많지 않고, 민주적 체계도 취약한 국가지만 오늘의 현실을 바꾸겠다는 뜻을 지닌 멜레스 제나위 총리가 한국의 발전 모델을 배우겠다고 나서 두 나라는 동반자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14일 29년 만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북한의 오랜 맹방 미얀마도 우리와 운명적인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단초는 민주화운동가로 잘 알려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아니라 이름도 낯선 테인 세인 대통령이다. 4성 장군 출신인 그는 군부독재 시절 승승장구해 철권 통치자(탄 슈웨)의 오른팔이 됐고 지난해에는 대통령으로 ‘임명되다시피’ 선출됐다.
그는 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이렇게 도와 달라’며 수십 항목의 자료를 1시간 동안 읽어 내려갔다고 한다. 미얀마의 1인자임에도 반세기에 걸친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무 관료들이 논의할 만한 이슈를 직접 제기한 것 같다.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을 실현하려는 의지만큼은 냉전질서를 바꾼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떠올리게 한다.
미얀마와 세인 대통령의 앞날은 누구도 낙관할 수 없다. 군부가 의회를 장악하고 있고, 막후의 군벌들이 현 단계의 정치개혁을 ‘고르비 흉내’로 의심하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정치범 석방, 민주적 선거제 도입이 과연 지속가능할지 예단하기도 어렵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경제 제재를 완전히 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방 언론은 지난해 3월 취임한 그를 허수아비로 묘사하면서 “고령의 20년 독재자 탄 슈웨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처럼 수렴청정하는 고립형 강압정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미얀마 의회의 첫 외국인 연설자가 되면서 막이 오른 미얀마의 개방을 확인하는 데는 11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장기 독재정권에 대해 ‘설마 달라지랴’ 하는 고정관념이 늘 옳지는 않은 셈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 대통령은 미얀마에서 북한의 미래를 본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얀마의 근대화를 도와 성공의 길로 안내함으로써 북한의 앞날에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대통령은 세인 대통령의 얼굴에서 북한의 누군가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짐작하건대 스위스에서 공부한 김정은의 훗날 모습일 수도, 선군정치의 수혜자이지만 내부 모순에 대한 개혁을 구상하는 어떤 장성일 수도 있겠다.
세인 대통령은 총리 시절인 2007년 초대형 사이클론이 미얀마를 덮쳤을 때 헬리콥터를 타고 황폐한 국토를 둘러봤다. 조국의 상처를 확인한 바로 그 순간 개혁을 결심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역사를 바꾸는 전환적 순간은 이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곤 한다. 군 장성들을 데리고 현장 지도에 열심이라는 김정은이 북한의 곳곳을 다니며 무엇을 보고 느낄지 궁금하다.
미얀마의 앞날은 아직은 미로다. 무엇이 세인 대통령의 생각을 바꿨는지, 실세 군부는 왜 지금까지 침묵하며 변화를 수용하는 듯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세인 대통령은 인터뷰에 나선 적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개방을 시작했다. 초기 성과는 미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미얀마의 변화 노력에 더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도와야 한다. 그가 성공해야 북한판 ‘테인 세인’의 등장이 앞당겨질 수 있다.-네피도(미얀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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