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리 장 구경을 간 날이다. 장이 서는 곳을 가끔씩 기웃거리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장마당에서 잔치국수를 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한 바퀴 둘러본다. 그때 어릴 적 보았던 야전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잡화를 차려 놓은 야전침대 옆에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다. 아직 개시도 못했는지 영 기운이 없어 보인다. 다행히 그늘 밑이라 비가 갑자기 와도 물건들이 젖지는 않을 것 같다. 점심을 못 먹었는지, 이것저것 물건을 만져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야전침대는 6·25전쟁 중에 군인들이 전장에서 사용했다. 휴전이 되면서부터는 상인들이 상품 좌판대로 용도를 변경했다. 조립식이라 노점 상인들이 들고 다니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야전침대를 본 순간 떠올랐다.
어머니는 장이 서는 곳을 따라다니는 장돌뱅이였다. 야전침대 위에 ‘메리야스’를 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에게는 아픔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장이 서는 날에는 장 구경을 하기보다는 어머니를 도와드렸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은 군중 속에 둘러싸인 약장수를 보거나 장에서 파는 맛있는 것들을 사먹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공부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장에 나오지 말라고 늘 호령을 했다. 갑자기 여름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 노점 상인들은 커다란 비닐을 마주 펴서 재빨리 물건들 위에 덮었다. 그때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뼈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있었다. 한쪽 팔이 어깨에 매달려 있어서 왼손으로 비닐을 들고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메리야스들이 비에 젖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다친 팔로 장에 나온다는 것이 힘들었겠지만 동료 상인들의 따뜻한 도움 덕분에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때 함께했던 동료 상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5일장이 서는 곳을 찾아가는 트럭 위에서 짐 보따리와 함께 떨어지는 또 다른 교통사고를 겪은 뒤 어머니는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허리를 쓰지 못하고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 후유증의 약으로 쓴다고 곰보 배추를 찾아 들판을 헤매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어머니의 얼굴은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처럼 계절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원래 얼굴색을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구순이 된 어머니는 병원에 누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깨끗하고 하얗다. 어머니의 우윳빛 피부가 여름에는 햇볕에 그을려서 까맣고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에 시퍼렇게 얼음이 박혔던 그 살결이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된다.
좌판의 저 여인도 그때의 어머니 나이쯤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방울이 달린 고무줄, 꽃핀, 이태리타월, 칫솔을 넉넉하게 골라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여인은 뜻밖의 고객에게 횡재라도 한 양 콧구멍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노래라도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여인의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짐을 어찌 하겠는가. 집에 가서 산 물건들을 누구에게 나누어 줄까. 그 사람들에게 덤으로 환한 웃음도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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